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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小熊秀雄

1937년

by wannee 2022.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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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餘暇善用

 

 

小熊秀雄

 

 

一九四のオリンピック大会際第一回国際休暇善用会議といふのが東京かれるはこの会議のくはしい内容らないがこれは社会人仕事余暇どうしたら娯楽保健のためにすことができるかといふ余暇善用世界会議であるといふ

 欧洲人はとかく会議きでそしてまた会議がうまいかれた会議成功不成功としてこの会議何等かの文化的意義びつけてゐる

 現代人生活から余暇といふものをめたらからは嘲笑されさうであるサラリーマンは勤務学生勉学主婦家事育児ひまくられてなどはないとはれさうだ

 

1940년 올림픽 대회때에 제1회 국제휴가선용대회라고 하는것이 동경에서 개최 되는데,나는 이

회의의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이것은 사회인의 일의 餘暇를 어떻게 하면 오락과 保健을 위하여

쓸수가 있을까 하는 <餘暇善用>의 세계대회라고 한다.

유럽인은 특히 회의를 좋아하며 그리고 또 회의의 案 構成이 훌륭하여 회의의 성공 여부는 별도로

이러한 종류의 회의는 어떠한 식의 형태로 문화적의의를 연결 짓고 있다.

현대인의 생활에서 여가라고 하는 것을 구한다면 어떤 사람에게서는 嘲笑를 받을것 같다.월급쟁이

는 근무로 학생은 면학으로 주부는 가사와 육아에 쫒기어서 여가라는 것은 없다는 말을 할것 같다.

 

 しかしこの会議善意解釈すればさうしたいてりゐてのないにとつてこそ余暇善用必要だらうところで我国現代作家小説一般読者はどういふ時間どういふ格好んでゐるかといふことはかなり問題となつてくるもし余暇善用小説といふことをへるとしたらしてこの会議主旨であるところの小説むといふことが娯楽保健適合するかどうか講談雑誌映画雑誌などは日曜日部屋げだしてんでも娯楽的である々するといふ意味保健的でさへあるつて智識人がこれらの文化性読物休日頭脳くするといふことは娯楽的であつても頭脳善用とはいへない

 

그러나 이 회의를 善意로 해석하면 그렇게 노동만 하고 있어 여가가 없는 사람에게 있어서야말로

<餘暇善用>이 필요할것인데 허지만 우리나라의 현대작가가 쓴 소설을 일반독자는 어떤 시간에

어떠한 모습으로 읽고 있을까 하는 것은 상당히 문제로 되고 만일<餘暇善用><소설을 읽는다>라고 하는것을 첨가한다고 한다면 과연 이 회의의 主旨가 되는 소설을 읽는다고 하는 것이 <오락과

保健>에 적합할지 어떨지?講談잡지,영화잡지 등은 일요일에 방에서 발을 뻗고 읽어도 오락적이며

기운이 뻣친다고 하는 의미로 보건적이기도 하다.그러나 오히려 지식인이 이러한 문화성이 낮은

읽을거리로 귀한 휴일을 머리를 나쁘게 한다고 하는 것은 오락적이긴 하여도 두뇌의 <善用>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다.

 

 清潔自然空気れるために一泊旅行をするとかスポーツや団体旅行をするなどといふことは常識的余暇善用であつて今更会議をもつまでもなくにすべての々がそれを実行してゐるがもし世界会議をもたなければならぬ現代人生活余暇悪用されてゐるとすれば非文化的閑文字氾濫文化程度読物存在げることが出来るだらう

 数十枚数百枚長篇小説読切掲載混沌たる文化批評などは読者がそれを通読するにはりにも内容的には味気なく心理的には娯楽的でない生理的にもまた非保健的である

 

청결한 자연의 공기를 접촉하기 위하여 하루 여행을 한다던가 스포츠나 단체여행을 한다고 하는 것은 상식적인 余暇善用이며 새삼 회의를 가질것도 없이 이미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실행하고 있지만 만일 세계회의를 갖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현대인의 생활의 여가가 악용되고 있다고 하면,

비문화적인 閑文字의 범람,문화정도가 낮은 읽을거리의 존재를 들수가 있을 것이리라.

수십장 수백장에 이르는 장편소설의 완전게재나 혼돈스러운 문화비평 등은 독자가 그것을 通讀하기에는 너무나도 내용적으로는 지루하고 심리적으로는 오락적이 아니며 생리적으로도 또 비보건적이다.

 

 結局一般読者小説むといふことなどは文学ファンといふアブノーマルな心理状態人間でなければへない努力ひては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ふ異常読書状態にをかされるいま日本文学通文芸批評家になるには改造とか中央公論とかくとも七八種雑誌彼是大小二三十篇小説評論ほんの数日読破してしまはなければならないそしてこの面白くもない小説いかにも面白くもないといふ理由人生的内容んでゐるかのやうに批評家ちよろまかしてしまひまた批評家そのものも職業的功利観から如何にも理由ありさうにその小説批評紹介するのである

 

결국 일반독자가 소설을 읽는다고 하는 것은 문학 fan이라고 하는 abnomal한 심리상태의 인간이

아니면 할 수가 없는 노력을 억지로 쏟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異常한 독서상태에 놓여지며 지금

일본에서 文學通이 문예비평가로 되는것은 改造라던가 中央公論이라던가 적어도 7,8종의 잡지로,

이것 저것 大小 이삼십편의 소설을 혹은 평론을 불과 몇일 사이에 독파해 버리지 않으면 안되며

그리고 이러한 재미도 없는 소설이 너무나도 재미가 없다고 하는 이유로 인생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것처럼 비평가를 속여 버리고 또 비평가 그 자체도 직업적인 功利觀에서 너무나도 이유가 있는듯이 소설을 비평하여 소개하는 것이다.

 

 だから賢明読者雑誌これらの批評家文章んだり一般的世評をきいてからなるべく評判小説掲載した雑誌んで残念なことにはくの文芸批評家なるものがれも作品評価態度しくて多分文壇ずれがして幇間性太鼓持をもつてゐるために信用のできる作品紹介をするものがつてない一人作家いところをあくまで支持してその作家運命にする気魄良心とをもつた批評家などは日本には見当らないさうした批評真実性欠除した読者不幸といはなければなるまい

 

따라서 현명한 독자는 잡지를 사기 전에 이러한 비평가의 문장을 읽거나 일반적인 世評을 듣고 나서 될수 있는한 평판이 있는 소설을 게재한 잡지를 선택하여 구입하며 게다가 유감스럽게도 많은 문예비평가라고 하는 작자가 어느것이든 작품평가의 태도가 괴이하며 다분히 문단에 어긋나서 북잽이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용할수 있는 작품소개를 하는것이 지극히 적으며 한사람의 작가의 장점을 끝까지 지지하여 그 작가와 운명을 함께 할 정도의 기백과 양심을 가진 비평가 등은 일본에는 찾아 볼수가 없으며 그러한 비평의 진실성이 결여된 나라에 사는 독자는 불행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所謂余暇善用小説をおみなさい――とすゝめる勇気にはないのである日本小説家小説勉強仕方には観念武装まだ二十代三十代作家くも現家[#「現実誤記われる観察者として作家生活つてゆく庶民的生活極度けるだがへてもみたまへ二十代三十代して人生観察者としての位置てるかどうかといふことを――。作者がいつも読者よりも客観的位置にゐるためには何故作家読者よりも主観的感情的になつてはいけないのだらう、『客観的でなければ小説けないといふ観念武装さういふ限界性豆粒よりもさなその作家主観はれるのである

소위 여가선용에 소설을 읽으세요!___라고 추천하는 용기가 내게는 없으며 일본의 소설가의 소설공부의 방법에는 우선 관념의 무장이 앞에 서서 아직 이십대나 삼십대의 작가가 이르게 現家의 관찰자로서 작가생활에 들어가서 서민적 생활을 극도로 피하나 허지만 생각해 보라!이십대나 삼십대에서 과연 인생의 관찰자로서의 위치를 가질수 있을까 어떨까 하는 것을____.작가가 항상

독자보다도 주관적,감정적으로 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객관적이 아니면 소설을 쓸수 없다>라고  하는 관념의 무장 속에서 그러한 한계성의 밑에서 콩알 보다도 작은 그 작가의 주관은 양육되어

지는 것이다.

 

 日本小説面白くなさはとしてこれらのつた散文精神主張者小説家大部分であるからであつて現実感情的生活するといふをもたないほどに作家になりたい々がいから読者思想的成熟した作家へることがなくいつも勉強最中小説家作品ませられるでは一人文芸批評家しくはないがもつと作家作品して冷酷点数をつける読者沢山殖へてほしいだけである

 

일본 소설의 재미가 없음은 주로 이러한 잘못 된 산문정신의 주장자가 소설가의 대부분이기 때문이며 현실과 함께 감정적으로 생활한다고 하는 여가를 갖지 않을 정도로 빨리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많기에 독자는 사상적으로 성숙한 작가를 맞이하지 못하며 항상 공부가 한창인 소설가의 작품을 읽게 되고 나는 지금으로서는 한사람의 문예비평을 바라지는 않지만 좀 더  작가의 작품에 대하여 냉혹한 점수를 줄 독자가 많이 이식되었으면 하는 바램 뿐이다.

 

作者読者との関係これはどつちがどつちにしてもびても妥協してもいけない一篇なり小説なりを読者んだときそれにする読者批評態度この作品して否定でなかつたら肯定そのれかであるいつもれる評価さうした作品作家にしてめて一人前であり読者にしてもまた一人前読者であらう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이것은 어느쪽이 어느쪽에 대해서도 아첨을 하거나 타협을 해서도 안되며 한편의 라던가 소설을 독자가 읽을 때 그것에 대한 독자의 비평 태도는 이 작품에 대하여 <강한부정>이냐 그렇지 않으면 <강한 긍정>이냐 그 어느 쪽이며 항상 확실한 평가 그러한 작품을 쓰는 작가에 있어서 비로서 한사람의 구실을 하며 독자에 있어서도 또 한사람의 구실을 하는 독자 일것이라!

 

演劇にさうした現象はれると観客席二派れて作品価値いてひをめる小説場合にもさうした問題熱狂的提出つてめて面白小説へる芸術作品場合、『面白といふ意味はあくまで人生的だといふ意味以外一歩すものではない人生的であるといふ意味除外した娯楽面白さといふものもあるがそれは文化的さであつてそれをむことにつて人間感情まるのではなくて感情められるのである

연극에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면 관객석이 두파로 나뉘어져 작품의 가치에 있어서 논쟁을 시작하며 소설의 경우에도 그러한 문제의 열광적인 제출에 따라서 비로서 재미 있는 소설이라고 말할수가 있으며 예술작품의 경우 <재미 있다>라고 하는 의미는 어디 까지나 <인생적>이다 라고 하는 의미 이외에 한 발도 내디딜수가 없으며 인생적이라고 하는 의미를 제외한 <오락>적인 재미도 있지만 그것은 문화적인 저질이며 그것을 읽음으로써 인간의 감정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고 개의 감정으로 떨어질수가 있는 것이다.

 

そして此処如何なる芸術人生的であり有益であり寝転んで価値があるか所謂人生活暇善用芸術といふかその人生的小説識別法べてよう

 小説小説との区別仕方であるそれは小説のテーマなり叙述全内容的なものに真実描写問題として当然現れてゐなければならない人間問題如何取扱はれてゐるかといふ吟味読者がやつてみたらいゝ人生超越してゐたりその取扱ひをしてゐたりそれにれてゐない作品日本作品いのである問題厳粛問題であるしそれを哲学書教科書のやうにではなく寝転んでめるところに小説面白さがある

 

그리고 나는 여기서 어떠한 예술이 <인생적>이며 유익하고 잠을 뒤척이며 읽을 가치가 있는가? 소위 인생의 活暇善用하는 예술인가?그 인생적인 소설의 식별법을 말해 보자! 불량 소설과 우량 소설과의 구별 방법이다.그것은 소설의 테마이며 서술의 모든 내용적인 것에 진실한 묘사의 문제로서 당연 나타나지 않으면 안되는 인간의 의 문제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吟味를 독자가 하였으면 하며 인생의  을 초월해 있거나 그 취급을 던져 보거나  그것에 접촉하지 않는 작품이 일본의 작품에 너무 많은 것이며 의 문제는 엄숙한 문제이며 그러나 그것을 철학서,교과서처럼이 아니라 누워서 읽을수 있는 것에 소설의 재미가 있다.

 

 

民衆諷刺(민중과 풍자)

 

小熊秀雄

 

 近頃政治上変化にあるこれを政治逆上したものつまり政治激昂とみていゝそれがしい変化激昂であればいゝがさうでなければ政治はこの変化があるたびごとに精力消耗する

 そんな場合民衆冷静であるとはヤキモチを政治といふものはなるべく民衆一緒になつて熱狂してほしいのである

 

요즘은 정치상의 변화가 빈번하며 이것을 청치가 逆上한것 즉<정치의 激昻>으로 보아도 좋으며 그것이 올바른 변화나 激昻이라면 좋으나 그렇지 않으면 정치는 이 변화가 있을적마다 정력을 소모한다.

그러한 경우에 민중이 냉정하면 그는 嫉妬를 하니 정치라고 하는것은 될수 있는한 민중도 함께 하여 열광하고 싶은것이다.

 

 ところが近頃大衆かに政治じつとみてゐる惨忍性をもちだしたのだ政治にとつては民衆がだんだん冷静になつてゆくといふことが都合がいゝことであるかいことであるか? 民衆自身にとつてはこれは物事して批判精神かすことを体得しだしたのだから仕方がない

 カッと逆上したりフラフラとせたりすることがだといふことを経験させられると着実行為といふものをいやでも尊重するやうにならざるをない民衆熱狂的である一面冷静であるもいまはたいといふことをらせるために民衆政治海際までいてれていかなければなるまい何故といつて政治といふものはなるべく温泉にひたつてゐたいのやうなものであるからである

 

허지만 요즈음의 대중은 조용히 움직이는 정치를 가만히 보고 있는 慘忍性을 지닌것이며 정치에

있어서는 민중이 점점 냉정하게 되어 가고 있는것이 상황이 좋은것인가 나쁜것인가?그러나 민중

자신에 있어서는 이것은 사물에 대한 비판정신을 움직이는 것을 體得한것이기에 어쩔수가 없다.

 

~하고 逆上하거나 비실비실 몸을 기대거나 하는것이 손해라고 하는것을 때때로 경험하게 되면

착실한 행위라고 하는 것을 싫어도 존중하는것처럼 되지 않을수가 없으며 민중은 열광적인 일면에

냉정하고 게다가 이번은 바다가 차갑다고 하는것을 알리기 위하여 민중은 정치를 바닷가 까지 손을 끌어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되니 왜냐하면 정치라고 하는것은 될수 있는한 온천에 적시고 싶은

生物과 같은것이기 때문이다.

 

 強力政治熱湯だとすれば無気力政治微温湯である民衆といふものは政治強力沸騰点へあげることも凍結点へひきをろすことも可能をもつてゐる

 もいけないのは中間的存在所謂微温的存在である

 批判精神としての諷刺これらの微温的なもののからはれてこない政治科学芸術する近頃一般民衆批判していものではないてより批判的でなければならない科学者政治家芸術家批判精神欠除[#「ママ注記しんでゐる状態である

 

力强정치는 熱湯이라고 하면 무기력한 정치는 微溫湯이며 게다가 민중이라고 하는 것은 정치를

진실로 강력한 沸騰點에 올리는 것도 凍結點으로 끌어 내리는것도 가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가장 불가능한것은 중간적인 존재 소위 微溫적인 존재이다.

비판정신으로서의 풍자는 이러한 미온적인 것들의 사고방식 안에서는 생겨나지 않으며 정치나 과학이나 예술에 대한 근래의 일반민중의 비판은 결코 낮은것이 아니고 오히려 보다 비판적이 아니면 안되는 과학자나 정치가나 예술가가 비판정신의 결여로 고민하고 있는 상태이다.

 

 芸術家だけが人生むといふ理由わけのわからない心理ちまはつた述懐をするのである

 これらの心理主義者民衆行為明快性意志簡潔性をではなく役目をする人生しいといふことはしげることではない彼等人生しいとして文体けるつまり文章廻転させるのである

 

예술가만이 인생에 괴로워 한다고 하는 理由下에 이유를 알수 없는 심리를 가지고 다니는 述懷

하는것이다.

이러한 심리주의자는 민중의 행위의 명쾌성이나 의지의 간결성에 물이 아니라 을 붓는 역할을 하며 인생은 괴롭다라고 하는 것은 어는것에도 머리를 기대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인생은 괴롭다 라고 칭하여 문체를 기울이며 머리를 돌리며 즉 문장을 회전 시키는 것이다.

 

 文字かれてゐるしかしんでもさつぱり面白くないといふのが近頃小説である

 民衆行為明快性意志簡潔性んでゐるときにこれらの文学者くものは民衆混乱へるために存在するやうなものである

 

확실히 문자는 쓰여지고 있으며 그러나 읽어도 개운하게 재미가 없다고 하는 것이 요즘의 소설이다.

민중이 행위의 명쾌성이나 의지의 간결성을 바라고 있을 때에 이러한 문학자가 쓰는 것은 민중에

혼란을 주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 같은 것이다.

 

 とかとかするとかするとか日常生活にハッキリと態度めてきてきたいといふことはすべての々のひであり近頃傾向であらうそして意味でのエゴイズムの発達観取されるそれなくては個人最小限自由最小限意志確立もないのである

 思索売品とする文化人論理的混迷買手としての大衆これらの思索人品物引取らないのである

 

이냐 이냐 로 할것인가 로 할것인가??일상생활에서 확실하게 태도를 결정하여 살아가고

싶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염원이고 요즈음의 경향일것이며 그리고 좋은 의미에서의 egoism의 발달이 파악되며 그렇지 않으면 개인의 최소한의 자유도 최소한의 의지의 확립도 없는것이다.

 その理由ははつきりしてゐる精神微温状態がそれである文学のその代表的人物林房雄氏がゐる林氏日本がこんなにさくかたまつてゐるといふことが西洋にくらべると々な問題さくしたり解決中途半端にしたりするのですがこれは西洋にくらべたら中途半端であつて日本はこの中途半端さによつて立派前進してゐる中途半端さが日本にとつては完全解決なのです――』、作家如何なる理由づけにづいても中途半端性めるといふことはない民衆はその中途半端性んでゐるのである諷刺はこの中途半端性しく対立しなければならぬ

 

그 이유는 확실하며 정신의 微溫상태가 그것이고 문학 쪽의 그 대표적 인물에 林房雄씨가 있으며

林氏<일본이 이렇게 작게 덩어리져 있다고 하는것이 서양에 비교하면 여러 가지 문제를 작게 하거나 해결을 중간에 어정쩡하게 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서양에 비교하면 中途半端이며 일본은 이

中途半端에 의하여 훌륭하게 전진하고 있으며 中途半端이 일본에 있어서는 실로 완전한 해결인것이다___>,작가가 어떠한 이유로던 근거를 대어도 中途半端性을 인정할수는 없는것이고 민중은 그

中途半端性으로 괴로워 하고 있으며 풍자는 이 中途半端性과 격렬하게 대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物事処理するのには中途半端方法がいちばんいなどといふ林房雄氏もし人間てはめてみると作家のやうに作家といふものは練習――きるものであるなどといふ乱暴生活態度もなく公開することになる

 林氏中途半端性肯定某作家練習きる作家などといふ言葉身分人間だけがしやべることの出来言葉であつて一般大衆生活にはあてはまらない乱暴言葉だといふのはさういふ意味でいふのである

 

사물을 처리하려면 <中途半端의 방법>이 가장 좋다라고 하는 林房雄씨의 사고방식을 만일 인간의

생존 방식상에 맞추어 보면 어는 작가처럼<작가라고 하는 것은 죽는 연습으로 ___살아가는 것이다>라고 하는 난폭한 생활태도를 부끄럼도 없이 공개하는 것이 된다.

林氏中途半端性의 긍정이나 작가의<죽는 연습으로 살아가는 작가>따위라고 하는 언어는 좋은 신분의 인간만이 지껄일수가 있는 말이며 일반대중의 생활상에는 맞지가 않으며 난폭한 말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의미로 말하는 것이다.

 

 何処にも練習などをしてきてゐる人間ない老婆でたたずんでゐるりかかつた一人何心なくさんにたいのならんだらいいだらう――』といふと老婆かららして水面えたをかけたいてしたといふ新聞社会面記事があつた

 この場合老婆して練習をしてゐたわけではない練習をしてゐたとしても練習をしてきるどころか練習をしてんだのだ

 

어느곳에도 죽는 연습등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인간은 없으며 노파가 밤에 다리 위에 서 있는데 지나가는 한 남자가 아무런 생각 없이<할머님! 죽고 싶으면 뛰어 내리시면 좋을거예요!__>라고 하니 노파는 다리에서 몸을 던져 수면으로 사라져 말을 건 남자가 놀라서 달아 났다고 하는 신문의 사회면 기사가 있었다.

 

 作家だけが練習――などといふ贅沢をもつてゐるだけである老婆をかけた通行人悪意があつてつたわけではないが老婆にとつては切実外部からの衝撃言葉であつたのである

 精神をもつた人間えてゐるわづかな掛声だけでむやうな危機をもつた人間くないのである

 

작가만이 죽는 연습___라고 하는 사치스러운 사고방식을 갖고 있을 뿐이며 노파에게 말을 건 통행인은 악의가 있어서 말했을리는 없지만 노파에 있어서는 절실한 외부에서의 충격의 말이었던 것이다.

나약한 정신을 가진 인간기 늘어나고 있어 별것 아닌 말만으로 물에 뛰어 들어가는 듯한 위험을

가진 인간이 적지 않은 것이다.

 

 作家がもしうした現実何時までも作家的なデレついた言葉出来合ひの言葉きつづけるとすれば民衆作家との関係いよいよれてしまふだけである作家民衆との民衆糞尿汲取人との関係よりも生活的にはかに縁遠いものにならなかつたらひである

 もののとしては林氏中途半端性肯定練習きようといふしつけはゆるせるだらうしかし民衆現実問題としてはこれらの言葉空語である論理世界でゆるせても民衆感情生活ではゆるせないだらう

 

작가가 만일 이러한 현실에 언제까지고 작가적인 민감한 말이나 기성품의 말을 계속 뱉는다면 민중과 작가와의 관계는 마침내 멀어져 버릴뿐인것이며 작가와 민중과의 접촉방법이 민중과 분뇨수거인과의 관계보다도 생활적으로는 아득히 인연이 먼 것으로 되지 않았다면 다행이다.

사물의 사고방식으로서는 林氏中途半端性의 긍정이나 죽는 연습으로 살려고 하는 강압방식은

인정할것이나 그러나 민중의 현실문제로서는 이러한 말은 빈말이고 특히 논리의 세계에서 인정하여도 민중의 감정의 생활상에서는 인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民衆感情生活めてゐるとき作家民衆感情圧殺のための作品いてゐるジイドが情熱発明す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つてゐるがくの作家はこのジイド的心理主義加担して民衆心理生活をなるべくくへんでかうかうとする労力民衆作家作品むことにつて自分生活心理的渋滞させられることをがつてゐる心理的渋滞現実渋滞だからだ民衆感情のはけ低劣ではあるが充分堪能させてくれる映画スポーツや流行歌といふ娯楽方面へもつてゆくジイドや日本くの作家達発明することができない情熱民衆何等かの方法でこの情熱発明創意性かせだした

 

민중이 높은 감정생활을 요구하고 있을 때 작가는 민중의 감정의 압살을 위한 작품을 쓰고 있으며

지이드가<정열은 발명할 수가 없다___>라고 말하고 있으나 많은 작가는 이 지이드적 심리주의에

가담하여 민중의 심리생활을 될수 있는한 멀리로 운반해 가자! 가자!라고 하는 노력을 쏟으며 민중은 작가의 작품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생활을 심리적으로 停滯되는것을 싫어하고 있으며 심리적인 停滯는 현실의 停滯이기 때문이고 민중은 감정의 출구를 열등하지만 충분히 참게 해주는 영화나 스포츠나 유행가라고 하는 오락방면으로 가지고 가서 지이드나 일본의 작가들이 발명할 수가 없는 정열을 민중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이러한 정열의 발명의 창의성을 발휘 하였다.

 

 つて空気銃標的つといふ種類遊戯単純馬鹿々々しいびに々とれないものがあるだらう

 民衆日常生活鬱積されたものがつてばせるのであるそれはいかにいものにしても激情性はれであるしさな標的らすといふ空気銃遊びは直視的感情はれとへる

彼女びながらグリゴリーは彼女んだ――』といつた表現外国小説にはかなり対手をはつきりつめるといふこの表現日本小説ないといふことは人間対人間精神的交渉曖昧さのはれである

 

접시를 깨고 놀며 공기총으로 표적을 쏜다고 하는 종류의 유희를 단순히 바보같은 놀이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라고 단언을 할 수는 없을 것이리라!

민중의 일상생활의 鬱積된 것이 접시를 깨며 노는것이며 그것은 아무리 저질스러운 것으로 하여도

격정성의 표현이고 작은 표적에 눈을 응시한다고 하는 공기총 놀이는 직시적인 감정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와 나란히서 그리고리는 그녀의 눈안을 들여다 보았다__>라고 하는 표현은 외국의 소설에는

제법 많으며 상대의 눈속을 확실히 볼수가 있다고 하는 이러한 종류의 표현이 일본의 소설에는 적다고 하는 것은 人間對人間의 정신적교섭상 애매한 표현이다.

 

 ピューマという猛獣がゐるこの獣仲間では精悍無比けたことがないといはれてゐる不思議なことにはこの人間にだけは柔順棍棒をもつた人間近寄つてもじつとかないしながら人間されてしまふ

 ピューマの人間心理状態複雑であるがいまこれをからぐとき崇高にうたれる無抵抗主義とみてもよいしい政治して民衆柔順でなければなるまいしくない政治してもし民衆政治民衆との関係人間対ピューマ的関係民衆しながら政治無抵抗主義されてしまふとしたら利巧なことではない

 

Puma라고 하는 맹수가 있는데 이 짐승은 짐승중에서는 精悍無比하고 한번도 진적이 없다고 하는데 이상한것은 이 짐승은 인간에게만은 전적으로 유순하여 몽둥이를 가진 인간이 다가 와도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눈물을 흘리면서 인간에 맞아 죽어 버린다.

Puma가 인간을 보는 심리상태는 복잡하지만 지금 이것을 아래에서 위를 바라볼 때 숭고한 감정에 몰입된 무저항주의라고 보아도 좋으며 올바른 정치에 대하여 민중은 유순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러나 올바르지 못한 정치에 대하여 만일 민중이<정치><민중>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

Puma적 관계에 있어서 민중이 눈물을 흘리면서 정치에 무저항주의로 맞아 죽어버린다고 한다면 그다지 영리한 것은 아니다.

 

 

ヒューマニズムとしくいはれてゐるがこの思想ほんの行動的無抵抗主義にすぎない動物ピューマの精神代表したピューマニズムとつたがいい

 人間本能最小限抵抗線対手から打撃をうけたとき――とかいとか感想べる程度思想ヒューマニズムであるから動物世界でのピューマニズムといひ人間世界でのヒューマニズムといひ没形式思想といへる

 

Pumanism과 성가시게라고는 하지만 이 사상은<극히 적은 한도의 행동적인 무저항주의>에 지나지 않으며 동물Puma의 정신을 대표한 Pumanism이라고 하는 쪽이 좋다.

인간의 본능의 최소한의 저항선에서 상대로부터 타격을 받았을 때 아파!__라던가 간지러워!하는 감상을 말 할 정도의 사상이 Pumanism이기에 동물의 세계에서의 Pumanism라고 하며 인간의 세계에서의 Pumanism라고 하며 沒形式의 사상이라 할 수가 있다.

 

 こゝでいふ没形式とはしい意味での形式ではなくのまとまつた形式もないのに形式があるかのやうに主張する形式主義者してつてゐるのであるこれらの没形式主義政治文学はその中味つぽであればあるほど外面的形式主義的になり心理主義的にならなければをれない

 民衆批判的精神これらの形式主義者心理主義者反撥する精神であり直視的態度相手社会的事件裏表分析してゆく

 

여기서 말하는 沒形式은 올바른 의미의 형식은 아니며 어떤 정리된 형식도 없는데도 형식이 있는것처럼 주장하는 형식주의자를 가리켜서 말하고 있는것이며 이러한 沒形式의 주의,정치,문학은 그

알맹이가 텅 비어 있으면 있는만큼 더더욱 외면적으로 형식주의적으로 되어 심리주의적으로 되지

않으면 있을수가 없다.

민중의 비판적정신은 이러한 형식주의자나 심리주의자와 반발하는 정신이며 직시적인 태도로 상대방이나 사회적인 사건의 表裏를 분석해 나간다.

 

 批判精神ゆる信仰相容れないものである民衆日常会話聡明れとして酒落ばす皮肉諷刺するといふことが近頃盛んになつてきたといふ現象民衆批判精神まりとして見遁すことの出来ない現象であらう

 芸術家作家だけが特別人生する洞察力運命指示するがあるかのやうにへては大間違ひであるとへよう何故といふに一般庶民には芸術的には優秀でなくても生活的には優秀人間がゐるからである独特意志力さや質朴力強性質責任観念不正義しては非妥協的性格これらの々のくない

 

비판정신은 모든 신앙과 서로 수용될수 없는것이며 민중의 일상대화속의 총명한 發現으로서 멋을 내지 않고 냉소적이고 풍자를 한다고 하는것이 요즘 인기절정으로 되어 온다고 하는 현상은 민중의 비판정신의 격앙으로소 간과할 수가 없는 현상 일것이다.

예술가,작가만이 특별히 인생에 대한 통찰력이나 운명의 안내를 지시하는 힘이 있는것처럼 생각하면 큰 잘못이러고 말할 수가 있으며 왜냐하면 일반서민중에는 예술적으로는 우수하지 않아도 생활적으로는 우수한 인간이 있기 때문이고 독특한 의지력과 끈기나 質朴하고 강한 성질,책임관념의

강함 不正義에 대한 전적 비타협적인 성격 이러한 사람들의 는 적지 않다.

 

 これらの生活人れも芸術家作家るともらない人生する洞察として直観として生活してゐるにはちるとぬまで芸術品なるものに接触する機会がなしにつまり一篇小説まなくても一生無事場合がある

 

이러한 생활인은 누구라도 예술가,작가에 못지 않게 열등하지 않고 인생에 대한 통찰이 있는 사람으로소 직시의 인간으로소 생활하고 있으며 그 중에는 태어나서 죽을때 까지<예술품>이라는 것에

접촉할 기회가 없이 즉 한편의 소설을 읽지 않아도 일생을 무사하게 끝나는 경우가 있다.

 

 これらの々を作品魅力でひきつけるといふことは容易ではないこれらの々に批判的文学提供するとき々はんでこの作品られた人生的意義ひつくだらう我国には民衆生活では批判としての諷刺皮肉つてゐるが文学世界では批判的文学としての諷刺文学勿論庶民的文学さへれないのであるジイドはその作品思想つて静観がはじまると風邪をひく――』といつてゐるが日本思想人思想がとまつて静観時代つた途端しきりにをして風邪をひいてゐる状態である思想文学むどころではない蒲柳である

 

이러한 사람들을 작품의 매력으로 끌어들일수가 있는 것은 쉬운 은 아니며 이러한 사람들에게

강한 비판적인 문학을 제공할 때 사람들은 기꺼이 이 작품에 담긴 인생적 意義에 빨리게 될것이고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민중의 생활속에서는 비판으로서의 풍자나 냉소가 교차하고 있지만 문학의

세계에서는 높은 비판적 문학으로서의 풍자문학은 물론 낮은 서민적문학조차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지이드는 그 작품속에서 <사상이 멈추고 靜觀이 시작되면 나는 감기가 든다___>라고 말하고

있는데 일본의 사상가는 思想이 멈추고 靜觀시대로 들어간 순간에 자주 재채기가 나서 감기에

걸리는 상태이고 강한 사상문학을 낳는것이 아니라 아직 체질이 약한것이다.

 

 作家心理的叙述のために――』といふ理由をつけていくらでも文章くかく自由をもつてゐるそして作家達言葉ではどうか作家座談会記事などをみてもそこでされてゐる作家言葉なるものはのはづれた人間同志会話のやうである

 だしいのは沈黙するために座談会出席してゐる座談会出席作家のことはない談話割込運動のやうに焦立をとるなら小林秀雄氏などはみなもので二人会話にすつと自分をさし両面がついてゐるか背中合せにつた一枚膏薬のやうでどつちの内股にも密着する

 

작가는<심리적서술을 위하여__>라고 하는 이유를 붙여서 어떻게 해서라도 문장을 길게 쓰는 자유를 갖고 있으며 그리고 작가들의 언어상에서는 어떤가?작가의 좌담회의 기상등을 보아도 그곳에서 나누고 있는 작가의 언어라 하는 것은 턱이 빠진 인간동지의 대화와 같은 것이다.

심하게는 침묵하기 위하여 좌담회에 출석하고 있으며 좌담회의 출석작가는 아무것도 아니고 담화에 끼어드는 운동처럼 안달을 하니 예를 들면 小林秀雄氏등은 교활한 자로서 두사람 대화 사이에

잽싸게 자신의 말을 끼어 넣어 양쪽에 풀이 붙어 있는건지 돌아선 등에 붙은 한 장의 고약과 같아

어느쪽 사타구니에도 밀착한다.

 

 民衆日常語作家のそれよりもつと簡潔要約的ニューアンスにんでゐる冗談洒落皮肉諷刺会話重要地位めてゐる

 これらの言葉民衆肉体的動作されるである生活的であるといふことは肉体的でありさうした労働過程でなければすべて純粋なものはれてこない低劣冗談洒落かされ皮肉感傷性諷刺つてはひとたまりもなくひやられてしまふ民衆日常語これらの諷刺的言葉はすべて民衆批判的生活れとして善意解釈していいしいに奨励していゝだらう

 

민중의 일상어는 작가의 그것보다 더욱 간결하고 요약적이으로 뉴앙스가 풍부하고 농담이나 멋이나 냉소나 풍자가 대화속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언어는 민중의 육체적인 동작속에서 교환되는 <>이며 생활적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적이며 그러한 노동의 과정이 아니면 모든 순수한 것은 나올수가 없고 저속한 농담은 가벼운 멋에 압도되고 냉소속의 感傷性은 높은 풍자를 만나면 잠시 머물지도 않고 쫏겨나버리며 민중의 일상어

속의 이러한 풍자적인 언어는 모든 민중의 비판적인 생활의 發現으로서 善意로 해석해도 좋으며

크게 장려해도 좋을 것이다.

 

 二六事件などといふ古今未曾有厳粛社会的事件きたときにさへあの交通杜絶状態へてゲラゲラつてゐた々をかけた杉山平助氏はあの事件てゐる子供接吻をしてから自分覚悟東京市内たといつてゐるあの突発事件一方ひにまでくとき一方感傷的厳粛であつた対立的なものがあるどつちもりではないより批判的であつたいのだらう

 諷刺的なものを粗野上品でないといふ意味軽蔑してゐるには謹厳なことが道徳的だとひこんでゐるひこませようとんでゐるがある

 

2.26사건이라고 하는 古今未曾有의 엄숙한 사건이 일어났을때 조차 저 교통두절의 상태속에서 배를 끌어 안고 껄껄대고 웃고 있던 사람을 보았으며 杉山平助氏는 그 사건 당일 자고 있는 애들에게 입맞춤을 하고나서 자신은 죽을 각오로 동경시내에 나갔다고 하며 저 돌발사건을 한쪽이 바로

웃음으로까지 안내 할때 한쪽은 감상적으로 엄숙하였으며 전혀 대립적인것이 있어 어느쪽도 잘못은 아니고 보다 비판적이었던 쪽이 위대할 것이다.

풍자적인 것을 粗野하고 上品이 아니라고 하는 의미로 경멸하고 있는 사람 중에는 근엄한 것이 도덕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 생각하게끔 계획을 세우고 있는 사람이 있다.

 

 この教育的位置つてゐるときはへられる子弟不幸である自分観念みほごすがないから適当なところで有効生徒はせてえこませるなどといふ手際いことが出来ないからである自分硬化した観念みほごすがなくて生徒観念硬化けるもまたひをじられた銀行会社などといふものもあるさうした一見厳粛雰囲気たされた銀行会社えない悪戯をするのやうに社員達案外イタヅラをしてゐるものである厳粛執務中事務員嬢などが片眼上役監視しながら事務机から南京豆などをしてべてゐるのである

 夫婦生活倦怠期一歩前夫婦間生活ひの素養つたら夫婦別れをしなくても

 

이러한 종류의 인간이 교육적인 위치에 서 있을 때는 가르침을 받는 子弟는 불행하며 자신의 딱딱한 관념을 부드럽게 풀 힘이 없기에 적당한 곳에서 유효하게 생도를 웃겨서 깨닫게 한다고 하는

처리능력을 잘 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자신의 硬化한 관념을 풀어내는 힘이 없어서 생도의 관념의

硬化를 피하는 힘도 없으며 웃음을 전적으로 봉한 은행 회사라고 하는것도 있으며 그러한 一見

엄숙한 분위기로 가득한 은행 회사는 고양이가 보이지 않는곳에서 장난을 하는 쥐처럼 사원들은

의외로 장난을 하고 있는것이고 엄숙한 집무중에 사무원 아까씨가 한쪽 눈으로 윗사람을 감시하면서 사무책상 속에서 南京(落花生)을 꺼내어 먹고 있는것이다.

부부생활의 권태기에 들어서는 일보전에 부부간의 생활에 웃음의 素養이 들어가면 부부간의 이별을 하지 않아도 된다.

 

 民間流行語替歌漠然とした内容をもちながらいつまでも流行するといふことは何等かの市民的真実性があるからで民衆はこれらの抽象語をいろいろの会話にはさみみながらひながら使つてゐるこの漠然たる流行語本質この抽象語社会的立といふものを分析してしまふのである

 その流行語れた又新しい言葉がそれにとつてかはる流行語伝播又決して愚劣なことではない

 一方民衆言葉政治的意味をもちだすと流行蜚語[#「流言蜚語誤記われる名前じられる民衆しい社会批判語しく流言しなければならない政府弾圧していゝのは流言ではなくて蜚語である

 

민간의 유행어나 가사만을 바꾼 노래는 막연한 내용을 가지면서 언제까지고 유행한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형태로던지 시민적 진실성이 있기때문이고 민중은 이러한 추상어를 여러 가지 대화속에서

교묘하게 끼어 넣으면서 웃으면서 사용하고 있는 사이에 이러한 막연한 유행가의 본질 이러한 추상어의 사회적 입장이라고 하는것을 분석해 버리는 것이다.

그 때가 유행어가 없어졌을 때로 또 새로운 언어가 그것에 대신하여 바뀌며 유행어의 伝播 또 결코 愚劣한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민중의 언어가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면 流行蜚語의 이름으로서 봉해지고 민중의 올바른

사회비판어는 바르게 流言하지 않으면 안되고 정부가 탄압해 가는것은 流言쪽이 아니라 蜚語쪽이다.

 

 

諷刺文学めに(풍자문학을 위하여) ---1937

 

小熊秀雄(오쿠마 히데오)

 

我国諷刺文学れる可能性があるとかいとかいふ批評家作家してははつきりへば憎悪感をもつてしてゐる何故それは諷刺文学たす本質的役割とこれらの批評家作家いてゐる文学論しての社会観とはしく対立的なものだからで諷刺文学では可能性問題ではないのである

 

우리나라에 풍자문학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을까 없을까 하는 비평가 작가에 대하여 나는 확실하게

말하면 증오감을 가지고 접하고 있으며 왜냐?그것은 풍자문학이 이루는 본질적 역할과 이들 비평가 작가가 안고 있는 문학론을 통해서의 사회관이라 하는것은 격렬하게 대립적인 것이기에 풍자문학은 지금으로서는 가능성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諷刺文学といふ文学形式政治的水準たされてめて問題となるつて現在諷刺文学現れよ――といふこの文学形式出現痛切じてゐるのみのとして目下のところ局限的ではあるが漸次大きな問題として論議再登場をみるだらうと

 何故私ういふことをはつきりへるかといへば現在小説表現形式しく対照[#「ママ注記くといふ目的には当然科学的表現辿らざるをないだらう科学的であることが感性さで停止するのであつたら諷刺的手法などは必要としないのである知性的にも感性的にも昂揚された一種激情性ともはれるべき効果表現上さうとてるだけが諷刺的手法看過できないことにひあたるだけである

 

풍자문학이라 하는 문학 형식은 정치적 수준에 세워져 비로서 문제가 되며 따라서 현재의 풍자문학 나나타시오!____라고 하는 은 이 문학형식의 출현을 통절히 몸으로 느끼고 있는 자만의 목소리로서 目下 국한적이기는 하나 점차로 커다란 문제로서 논의의 재등장을 볼것이라고 생각 한다.

 

왜 나는 이러한 것을 확실하게 말할수 있을까 한다면 현재의 나 소설의 표현형식이 올바르게 대조를 그린다고 하는 목적하에서는 당연히 과학적인 표현의 길을 찾지 않을수가 없을 것이다.과학적인 것이 感性의 밑바닥에서 정지하는 것이었다면 풍자적수법 등은 필요로 하지 않는것이며 지성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昻揚된 일종의 격정성이라고도 말하여야 할 효과를 표현상으로 가져올려고

궁리하는 자만이 풍자적 수법을 看過할 수가 없는 것에 생각이 미칠뿐이다.

 

 小林秀雄氏悪霊についてでドストヱフスキイにれて世界いてフロオベルの所謂花崗岩にはドストヱフスキイは出会はなかつたんだれゝば花崗岩したこの残酷才能には冷笑けてゐたといつてゐるが小林氏ふやうにドストヱフスキイは冷笑的でなかつたといふことが事実だとすればドストヱフスキイは冷笑主義者よりももつと高度のリアリストであつたからではないか

 

고바야시 히데오<惡靈에 관하여>에서 도스토에프스키에 접촉하여<세계를 걸어서 플로베르의

소위(花崗巖)에는 도스토에프스키는 만날수가 없었으며 그의 손을 만지면 花崗巖도 피를 흘리고

<잔혹한 재능>에는 冷笑가 전혀 빠져 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고바야시가 말하는 것처럼

도스토에프스키는 냉소적이 아니었던 것이 사실이라 한다면 도스토에프스키는 냉소주의자보다고

훨씬 고도의 realist였기 때문은 아닐까?

 

 小林氏はドストヱフスキイを何故残酷才能のもちとするか残酷才能からは冷笑れなければ諷刺れはしない残酷方法からはこれらのものはれる小林氏はドストヱフスキイをリアリストとめてゐながらどこまでも才能主義者としてめてゆくところにドストヱフスキイといふ人間からもドストヱフスキイの作中人物からも冷笑的人物諷刺的人物れをも小林氏発見することができないだらう

 

그러나 고바야시는 도스토에프스키를 왜 <잔혹한 재능>의 주인인가?전적으로 <잔혹한 재능>으로부터는 냉소도 나오지 않을뿐더러 풍자도 생기지 않는데 그러나 <잔혹한 방법>으로부터는 이러한 것들은 생기며 고바야시는 도스토에프스키를 realist로 인정하고 있으면서 어디까지나 재능주의자로서 인정해 가는 점에 도스토에프스키 라고 하는 인간으로부터도 도스토에프스키의 작중인물로부터도 냉소적 인물,풍자적 인물 어느것을 고바야시는 발견할 수가 없었을 것이리라!

 

 小林氏けていてゐる創造した滑稽人物一人へばガヴリイラ・イヴォルギンの父親にしてもその印象はまことに々しいのであるかういふ資質諷刺的才能へるのに不便――』こゝでもまた才能きわけてをとるのがどれほどみであつても仲間では才能ともをとる才能』、ともはないだらうカユイといふかすことの出来ない現実のためにさうするのであるドストヱフスキイが作中人物ガヴリイラ・イヴォルギンの父親資質諷刺的才能をもたせなかつたのは才能などといふくのばす作中人物へなかつただけである

 

고바야시는 계속적으로 쓰고 있는 <그가 창조한 가장 해학적인 인물의 한 사람 예를 들면 가브리엘이볼킨의 부친에 있어서도 그의 인상은 진실로 아픈 것이며 이러한 자질은 풍자적 재능을 가지고 참을수가 있음에도 아직은 불편하다___>여기서도 또<재능>이며 손톱이 긴 짐승이 털을 헤쳐서 벼룩을 잡는것이 어느 정도 솜씨였다 하여도 짐승들 사이에서는<손톱이 긴 재능>이라 하여도 <벼룩을 잡는 재능>이라고 말을 할 수가 없을것이며 <가려워!>하면서 움직일수가 없는 현실 때문에 그러한 것이고 도스토에프스키가 작중인물 가브리엘이볼킨의 부친의 資質<풍자적 재능>

가지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은 재능이라고 하는 손톱을 길게 하여야 할 여가를 작중인물에 줄수가

없었던 것뿐이다.

 

 諷刺的綜ソ諷刺文学特殊才能かられてくるとする日本批評家作家達いのではこれをするために小林氏いたのである諷刺的手法とはつてゐるが諷刺的才能などとは一度つたことはない日本諷刺文学確立必要とする現実才能といふくのびるのをつゐる[#「つてゐる誤記われる悠長人間もゐるらしいがこの才能主義作家つてはしい諷刺文学確立ることがないだらう

 

풍자적 짜깁기나 풍자문학을 특수한 재능에서 생겨나온다고 하는 일본의 비평가나 작가들이 많기에 나는 이것을 정정하기 위하여 小林氏의 사고방식을 예로 들은것이고 나는 풍자적인 수법이라고는 말을 하나 풍자적 재능 등은 한번도 얘기한 적이 없다.일본에 풍자문학의 확립을 필요로 하는

현실에 재능이라고 하는 손톱이 길게 자라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悠長한 인간도 있을 듯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재능주의의 작가에 의존하여서는 새로운 풍자문학의 확립을 볼수가 없을 것이리라!

 

 三木清氏がまた小林氏をかけて諷刺する珍妙意見をもつてゐる三木氏弾力ある知性』(文藝七月号諷刺文学する要求しく公然ばれてゐるにはらずそれがはれないといふには理由がある諷刺知性贅沢必要とするのである――』といふ諷刺贅沢説であるよく諷刺文学圧迫する回避であるとか実直にものをへない怯懦人間方法であるとか諷刺などとは卑怯だとかいふ諷刺文学する批難者があるがこれらの批難者三木氏のやうな知性贅沢みだした偽諷刺文学作品してはれるべきであつて諷刺文学本質論してはおかどひの評言であらう

 

三木淸氏가 또 小林氏에게 동그라미를 그리고 풍자에 대한 珍妙한 의견을 갖고 있다.三木氏<탄력 있는 知性>(文藝 7월호)에서 풍자문학에 대한 요구가 이미 오랫동안 공공연히 외쳐짐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풍자는 知性의 사치를 필요로 하는것이다__>라고 하는 풍자사치이다. 흔히들 풍자문학은 압박에 대한 회피라던가 솔직하게 의견을 말할 수가 없는 비겁한 인간의 방법이라던가 풍자 따위는 비겁함이라던가 하면서 풍자문학에 대한 비난자가 있지만 이러한 비난자들은 三木氏와 같은 지성의 사치가 낳은 허위 풍자문학 작품에 대하여

말해지고 있는것 뿐이며 풍자문학 본질론에 대하여서는 헛다리를 짚은 評言일것이리라!

 

 抽象的知性主義者これまでも諷刺文学直情的方法んだ攻撃力効果抹殺するために下品だとか野卑表現であるとかの批難げかけてたし今後ても洗練された紳士のお上品知性がすといふ意味批難されるだらうこの紳士のためには知性贅沢みだすところの特殊諷刺作家をお作家にしたらいゝ々はまたなところに々の諷刺作家対立させるだけである

 

추상적인 지성주의자는 지금까지도 풍자문학의 直情的 방법이 낳은 공격력과 효과를 말살하기 위하여 下品이라던가 야비한 표현이라던가 하는 비난을 던져 오고 있으며 今後로도 세련된 신사의

上品知性을 어지럽힌다고 하는 의미로 비난 받을것이다.이러한 종류의 紳士를 위해서는 지성의

사치가 낳은 특수한 풍자작가를 끌어 안고 작가로 하면 좋으며 우리들은 또 별난 곳에 <우리들의

풍자 작가>를 대립 시킬 뿐이다.

 

 

川端康成論

川端康成論

 

 この作家今時喧ましい散文精神究明域外にある作家つていゝだらう一言へば川端康成小説家ではあるが散文精神とは関係がない――といへるのであるまた御本人所謂散文精神なるしいリアリズムをどうかうしようといふ熱意ももつてゐなけれはもないのである。――これだけ規定してをいてからでなければ川端ずる不可能である。「雪国其他作品小説作法典型のやうにはれまた作品的にも読者感銘へたしかしそれは特別観点からでなければ単純にその作品作品とははれない

 詩人立場として小説との明確区分要求するが小説精神から逸脱して効果読者吸収してゐるやり川端康成氏作品小説家小説とははないのつくるものは小説ではなくて全部民謡である

 読者はこの言葉唐突性ひをもつだらうしかし読者がもし紙面をまつ活字められてゐるといふ意味小説――気早めてしまはずに文章作者心理そしてその作家感情表出姿などを意地悪観察したらいゝ民謡でもバラッドとばれるものはその形式説話体であることだ川端氏作品のテーマイデオロギー散文精神といふよりも詩精神であるそして人情的感傷性民衆むために民謡精神麺棒きのばして小説銘打つてゐる

 みに諸君小説のどれでもいいから会話つたものをんで会話のまづめの言葉だけをつてみたらいゝ会話めの言葉はきまつてヒステリーのやうにどれも語感言葉使つてゐるその語感さで読者をひきずつてゆくのである語感けによつて小説をつくるといふことは散文家としては最初みをもつが最後弱味となるだら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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