戦場の客人(전장의 나그네) 1938年
小熊秀熊(오쿠마 히데오)
東洋の諺に、待たれる身になつても、待つ身になるなといふことがある。大作家ドストヱフスキイも、待つ身の辛さを経験したことがあるとみえて、『事態の幸福な解決を待ちあぐみながら、暗さと寒さの中で、二時間余も立ちつくしてゐたら、人間は大抵のことを考へ尽してしまふだらうぢやないか』といつてゐる。
동양의 속담에 기다려지는 몸이 되어도 기다리는 몸은 되지 마라!라고 하는 말이 있다.大作家 토스토에프스키도 기다리는 몸의 괴로움을 경험한 적이 있는것으로 보여서 <사태의 행복한 해결을 기다리다 지쳐서 어둠과 추위 속에서 두시간 이상이나 서 있으면 인간은 대부분의 일을 완전히 생각해 버리지는 않을까?>라고 말하고 있다.
日支事変を中心問題として考へてゐる。政府と国民と、そのどつちが事態の解決を――、待つ身、待たれる身であるか。こゝでは一寸どつちがどうと軽忽にきめられまい。何れにしても『有利な解決』を望んでゐる点で同じ立場な筈だ。
人間心理を引きだすことでは無限に続く糸の一端をとらへてゐたのではないかと思はれる程の、優れた心理描写をしたドストヱフスキイも、待つ身の立場になれば二時間で頭が空つぽになつたといふ。まして平素から精神的に貧困な日本の作家などは、二時間どころか、事変が勃発した途端に、頭がカラになつたのも無理がない。
日支사변을 중심문제로 생각하고 있다.정부와 국민과 그 어느쪽이 사태의 해결을____기다리는 몸,기다려지는 몸일까?여기서는 좀 어느 쪽이 어떻다고 경솔하게 결정될수가 없다.어쨋거나 <유리한 해결>을 바라고 있는 점에서 같은 입장은 분명하다.
인간심리를 끌어 낸다는 것은 무한하게 계속 되는 실의 한쪽 끝을 잡고 있는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될 정도의 특출한 심리묘사를 한 토스토에프스키도 기다리는 몸의 입장이 되면 두시간으로 머리가 텅 비어진다고 한다.게다가 평소부터 정신적으로 빈곤한 일본의 작가 등은 두시간 커녕 사변이 발발한 순간 머리가 비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従軍作家とは、平素から心掛けの悪い鮨屋のやうで、鮨のトロを売り切らしてお客に叱られてから、慌てて河岸に仕込みに走るやうなものだ。事変物以外には、描く人生がないかのやうに考へ出したのである。
종군작가와는 평소부터 마음가짐이 좋지 않은 횟집처럼 지방질이 많은 마구로를 잘라 팔아서 손님에게 야단을 맞은 뒤부터 당황하여 생선시장으로 재료를 사러 달려가는 것 같은 것이다.事變物 이외는 묘사할 인생이 없는것 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事変が起ると同時に、民衆の頭の中から確に何物かが『失はれた――』、時日が経つと忘失したものが何であつたか、その正体を究めようとする慾望が、日増しに昂まつてくる。人々は少しでも客観的に立つて、自分の周囲を見ようと焦躁する。ところが事実は、平素から机に噛ぢりついて『客観的』に物事を見るといふことを職業としてゐる作家稼業のものが、却つて真先に慌てだしたのである。
사변이 일어남과 동시에 민중의 머릿속에서 분명 어떤 것이<잃어 버렸다!__>시일이 지나면 잃어 버린 것이 무었이었나 그 정체를 규명하고자 하는 욕망이 날이 갈수록 커져 온다.사람들은 조금이라도 객관적으로 되어서 자신의 주의를 보고자 초조해 한다.허지만 사실은 평소부터 책상에 달라 붙어서 <객관적>으로 사물을 본다고 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 작가 生業이 오히려 제일 먼저 당황하는 것이다.
泥の中の、ミミズがハンケチで、しきりに眼を拭いてゐた。ミミズは周囲の状態を客観的に見ようと考へたらしい。然しミミズは眼のついてゐると思はれる辺を、こすりまはすだけで、ハンカチがさつぱり眼につきあたらなかつたといふことである。
眼も鼻もない、のつぺらぼうな、心理的にはミミズのやうな作家を、軍部が戦地に引きだして、それに急に『客観的な眼』を開かせようとするのは無理な注文である。それはミミズに客観性を求めるやうなものだ。まだ泥で頭を満たして帰れたらいい方で、戦地で強烈な衝撃をうけ、心労と、痲痺と、忘却とで、頭を荒して帰つてこなければ幸である。
진흙속의 지렁이가 손수건으로 자주 눈을 닦고 있다.지렁이는 주위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보고자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그러나 지렁이는 눈이 붙어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주변을 부벼댈 뿐으로 손수건이 시원하게 눈에 닿을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눈도 코도 없는 밋밋한 귀신과 같이 심리적으로는 지렁이와 같은 작가를 軍部가 戰地로 끌어 들이고 거기에서 급히<객관적인 눈>을 열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주문이다.그것은 지렁이에게 객관성을 요구하는 것 같은 것이다.아직 진흙에서 머리를 채우고 돌아가면 좋은 것으로 戰地에서 강렬한 충격을 받아 心勞와 마비,망각으로 머리를 엉망으로 만들어 돌아오지 않으면 다행이다.
作家の従軍は、市議員の大名旅行と変りがない。戦地では、割り当られた日程を追ひ廻される『戦場のお客人』である。戦塵の凪ぎた合間に、従軍作家が戦場のリアリズムを拾はうとして、兵卒達の休息してゐる溜りにでかけていつた。兵卒に『如何ですか、戦争はさだめし辛いことでせうね』と話しかけ兵卒の口から何事か引き出さうとした。兵卒は直立不動の姿勢で
작가의 종군은 시의원의 사치여행과 다르지 않다.戰地에서는 할당된 일정에 혹사 당하는 <전장의 나그네>이다. 전쟁의 먼지가 멈춘 순간에 종군작가가 전장의 realism를 줏고자 하여 병졸들이 휴식하고 있는 웅덩이로 달려 갔다.병졸에게<어떻습니까?전쟁은 분명 괴로운 것이겠지요?>하고 말을 걸자 병졸의 입에서 무언가가 나오려 하고 있다.병졸은 직립부동 자세로...
『ハッ、小説家ドノでありますかッ、異状ないであります――』
と答へる位が関の山である。戦場の下士卒の眼に映じた従軍作家なるものは、戦場の客人であると同時に、完全に上官でもある。
<넷!소설가 님이십니까?이상 없습니다!!__>
라고 대답하는 정도가 고작이다.전장의 下士卒의 눈에 비친 종군작가 라는 것은 전장의 나그네임과 동시에 완전히 상관이기도 하다.
軍当局がもし何か感違ひして、僕に従軍せよと命じ、二千円の仕度金を渡されたとする。これから寒さに向ふ戦地である。仕度金分だけ身造らへして出かけるとして、一枚百円のオーバーを二十枚も重ねて着込んで出かけねばなるまい。
さうした自分の姿を想像してもあまりいゝ格好ではない。オーバー二十枚の重ね着をして歩るけると仮りにしても、それよりも、作家として、重く堪へ難いものは招待旅行に振り当られた義務や、心理的な負担のそれである。招かれた旅行では、時には心にもないお世辞を言はなければなるまい。
軍당국이 만일 무언가 잘못 짚어서 내게 종군하게 하고 명령하여 이천엔의 준비금을 건네 주었다고 한다.이제부터 추위를 향한 戰地이다.준비금 만으로 몸을 만들어서 나가자 하여 한장에 백엔 하는 오바를 스무장이나 겹쳐 입고서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도 너무나 좋은 모습은 아니다.오바 스무장을 겹쳐 입고서 걸을수가 있다면 설사 그렇다 하여도 그것보다도 작가로서 무겁고 참기 어려운 것은 초대여행에 할당된 의무나 심리적인 부담 그것이다.초대 된 여행에서는 때로는 마음에도 없는 빈말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政治の細部 一九三八年
村に橋がなくて百姓達が廻り路をしてゐたのが、橋が架けられた、それが村の個人の寄付で架橋されたものより、例へどんな粗末な丸木橋であつても、国家の政策に依つて、つくられた橋であることを望む、その方がより感謝する。
마을에 다리가 없어 백성들이 우회로를 택하여 길을 가고 있는데, 다리가 놓였다, 그것이 마을 개인의 기부로 세워지는것보다는 예를 들어 어떤 조잡한 아취형 다리라 하여도 국가의 정책에 의하여 만들어진 다리임을 바라는것이고 그 편이 보다 감사한 것이다.
国家の政策が細小のものに及べば及ぶほど、民衆の生活の細部に触れるから、政治の機構の沁み透り方としても大きい、政治の批判もまた細小のもので最大に論じられる場合が多い。
국가의 정책이 사소한것에 조차 미치면 미칠수록 민중의 생활 세부에 와 닿기에 정치 기구의 흡수로서도 크며 정치 비판도 또 사소한것에서 최대로 논해질수 있는 경우가 많다.
国民もどうやらバット八銭にも馴れたやうだ、マッチも値上りだ、例へば政府が木材節約のために、マッチの軸木を現在よりずつと短かく、四分の一位にしても、それが正当な理由なら国民は決して不平をいはない、指先の火傷を避けるために、アルミニュームの指サックを発売すればいいし、ニュームは軍需材料でいけないといへば、国民の全部が親指と人さし指との爪を長くのばせばいゝ、それも御法度となれば、国民は火をつけない煙草から煙位出してみせる。
국민들도 어느정도는 그릇속 여덢푼에도 익숙해 있는듯하며,성냥값도 오를듯한데 가령 정부가 목재절약을 위해서 성냥개피를 현재보다 훨씬 짧게하여 4분의 1로 하여도 그것이 정당한 이유라면 국민은 결코 불평을 하지 않으며 손가락 화상을 피하기 위해서 알루미늄 덮개를 발매하면 좋을것이고, 알루미늄은 군수재료로 할수 없다고 하면 국민 전부가 엄지손가락과 집게 손가락의 손톱을 길게 기르면 좋을것이고 그것도 위법이라고 한다면 국민은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에서 연기를 뿜어 내는 재주를 보여준다.
そのやうに国民は節約に就いては独創的で、政策に対しては柔順な用意がある、然し私の望むのは目先の小さな政策ではなく、政治が国民の心の細部に触れて欲しいといふのである。最近の政治にせよ、文学にせよ、甚だガサツなものが多い、文学の方で稀に細かな文学をみつけても、それは真個(ほんと)うに細かいのではなくてウルサイのである。
그처럼 국민은 절약에 대해서는 독창적이고 정책에 대해서는 유순한 준비가 있는데, 허나 내가 바라는 것은 눈앞의 작은 정책은 아니며 정치가 국민의 마음속 세부에 접촉하여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최근의 정치나 문학에 있어서 아직도 거친면이 많으며 문학 방면에서 극히 세세한 문학을 발견했어도 그것은 진정으로 세세한것이 아닌 성가신 것이다.
衆議院の国家総動員法案委員会で、佐藤中佐が『黙れ――』と議員を叱咤して問題を起した、佐藤中佐は弥次をウルサがつたのであつた、然し中佐は政府の説明員といふ立場にあつて、議案の説明といふ限界を越して、議論的、討論的な態度であつたから、それを議員がウルサがつて弥次つたのである、お互ひにウルサがつた結果の紛擾であつた。『黙れ――』といふ言葉は、言葉の性質に少しも文化的な内容を含んでゐない、いはゞ言語の歴史的機能を果し終つた、中世紀的なもので、それを突然現代の中に引き出してきたので、議場などといふ、それでなくても白昼夢的な雰囲気の中に、更に一層古風な『黙れ』といふドラマチックな興味を国民に与へた。
중의원의 국가총동원법안 위원회에서 사또오 중좌가<입 다물어..>하고 의원을 질타하여 문제를 일으켰으며 사또오 중좌는 그러한 조롱을 성가롭게 여겼으며,허나 중좌는 정부의 설명원이라 하는 입장에 있어서 의안의 설명이라고 하는 한계를 넘어서 의론적,토론적인 태도였기에 그것을 의원이 성가시게 조롱을 한 것으로 서로 성가신 결과의 야단법석이었다.<입 다물어> 라고 하는 말은 언어의 성질에 조금도 문화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는 소위 언어의 역사적 기능을 다 마치어 버린 중세기적인 것으로 그것을 돌연 현대속으로 끄집어 낸것으로서 의장 등 라고 하며, 그렇지 않아도 낮잠을 자는듯한 분위기 속에서 더 더욱 고풍스러운< 입 다물어> 라고 하는 드라마틱한 흥미를 국민에게 주었다.
ケーベル博士はその随筆の中で『聞くところによれば日本語には罵言の語が極めて少く、又凡そ我が(独逸)の『豚奴』とか『畜生』とかいふ位の可成り無邪気な――時によれば愛撫の語としてさへ用ゐ得るが如き――語よりも強い詞が無いといふことである』
케벨 박사는 그 수필중에서 <소문에 의하면 일본어에는 욕지거리 말이 극히 적으며 또 대체로 나의(독일) <돼지같은 놈>이라든가 <개자식>이라든가 하는 상당히 악의가 없는-때에 따라서는 애무의 말로서 사용할 수가 있으며-말보다도 강한 문장이 없다고 한다>
などと本気かお世辞か云つてゐるが、議会の黙れ問題は日本にも相当効果的な強い罵言のまだ存在することを立証したやうなものである。
어쨋거나 본심인지 애교인지 말하고 있으나 의회의 침묵의 문제는 일본에도 상당히 효과적인 강한 욕지거리가 아직 존재함을 입증한듯한 것이다.
軍人にかぎらず、日本人が『豚奴』とか『黙れ』とかいふ罵言を独逸流に相手が愛撫の語として受取るやうになるまで、ユーモアを解する国民になるには、まだ少し間があるやうだ、軍人が奥様風に『お黙り』などといつては一層可笑しいので、ユーモアを解する時代であつたら佐藤中佐が軍人らしく活発に『黙れ』といつても不自然ではなかつたのである。
군인에게 국한되지만은 않고 일본인이 <돼지같은 놈> 이라든가<입닥쳐>라고 하는 욕을 독일식으로
상대가 애무의 말로서 받아들이게 될 때까지 유모어를 해석하는 국민이 된다하는것은 아직은 조금
거리가 있는듯하며 군인이 부인들에게<입닥쳐>라고 말하면 한층 가소러운 것으로 유모어를 해석하는 시대였다면 사또오 중좌가 군인답게 활발하게<입닥쳐>라고 말을 하여도 부자연하지는 않은 것이다.
日本人の性質、言語、挙止、の端正さをケーベル博士は賞めてゐて、それは日本人の『殆んど過度の謹厳とも謂ふべき』といひ『その点に於ける敏感――』といつてゐる。
일본인의 성질,언어,거동,단정함을 게벨박사는 칭찬하고 있으며 그것은 일본인의 <거의 과도한 근엄함이라고도 말하여야 할것>라고 하는<그 점에 있어서의 민감함>라고 말하고 있다.
日本人は余り敏感にすぎて、指で触れるとピンと硬直してしまふ何かの虫があるやうに、日本人は硬ばりすぎるところから、そこに発しられる言語は、政治用語にせよ文学用語にせよ、ガサツであるか、ウルサイかその何れかであつて真に心の細部に触れる言葉をもつてゐない、政策がガサツであれば国民生活のウルササに触れてくるし、その反対に政策がウルサすぎれば、国民はガサツに済ましてしまふ、求めるものは政府と国民との間に、粗末でもいゝから完全に渡ることのできる一本の丸木橋である。
일본인은 너무나도 지나칠정도로 민감하며 손가락으로 누르면 깜짝하고 경직되 버리는 벌레처럼 일본인은 지나치게 경직함이 있기에 거기에서 나오는 언어는 정치용어라든가 문학용어라든가 난폭함이나 성가심 그 어느것이든지 진정한 마음의 세부에 닿는 언어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정책이 난폭하면 국민생활의 성가심에 접촉해 오며 그 반대로 정책이 성가시게 되면 국민이 난폭해 버리게 되고, 원하는것은 정부와 국민과의 사이에 조잡하여도 좋으니 완전하게 건너갈수가 있는 하나의 아취형 다리이다.
日本の政治家の動きもさうであるが、日本の作家の作品活動の小ささは、直接的にはその作品の矮小感となつて現はれてゐる、スケールの小さな底の見え透いた作品揃である、北海道の伝説に、大雪山の山頂にはコロボックル族と呼ばれる一寸法師が住んでゐるといはれてゐるが、これらのコロボックル人達は蕗の葉の下で社会生活を営んでゐるが、その背景とする自然の、雄大さ、美しさと、人間との関係に於て有機的であらうから、随つてこの一寸法師が小説を書いたら、日本の作家より遙かに世界観の大きな作品をうむだらう、現在の我が国の作家達は既に自然から弾き出された人達である、そこには只人間と人間との関係に於て事件を描く、その間に自然観が介入しない、複雑な人間関係がすべて小説であるかのやうに思ひこんでしまつた。
일본의 정치가의 활동도 그렇지만 일본의 작가의 작품활동의 작음은 직접적으로는 그 작품의 왜소감이 되어 나타나 있는 스케일이 작은 믿바닥이 훤히 보이는 작품류이며, 홋카이도 전설에 대설산의 산정에는 코로복쿨족이라 하는 일촌법사가 살고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코로복쿨 사람들은 후끼잎아래에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 배경이 되는 자연의 웅대함 아름다움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건을 묘사하고 그 사이에 자연관이 개입되지 않고 복잡한 인간관계가 모두 소설인것처럼 생각이 든 것이다.
日本の最近の小説家が読者を引離してしまつた理由はその辺に事情が隠れてゐよう、最近農民小説が擡頭してきたかのやうに思はせるのは、地方の自然を背景とした、その自然と人間との関係に於いて、心理の新しい機構を、これらの作品から読者が求めようとしてゐるからだ。
일본의 최근 소설가가 독자를 떠나버리게 된 이유는 그 주변에 사정이 숨어 있는듯한,최근 농민소설이 대두해 온것처럼 생각하게 하는것은 지방의 자연을 배경으로 한 그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심리의 새로운 기구를 이러한 작품에서 독자가 구하고자 하고 있기 때문이다.
作家が現実の『時間』といふものを、自然を排除して人間と人間との関係に於いてのみ、極限を見出さうとするときは、究極は無と混乱が答へとなるだけだ、丁度女の児達がお互の指から指へ糸を渡しあつて、川とか亀とかいろ/\糸の形を変化さして楽しむ『糸取り遊び』のそれのやうに、結局は糸をもつれさしてしまふ、人間の時間をもつれさして、それが社会であり、小説であり、人生であるなら、フランスの作家プルーストに『時といふものをすべて知りながら、私は全然人生といふものを理解しません――』などとは告白させはしなかつたらう。
작가가 현실의 <시간>이라고 하는것을 자연을 배제하여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만 극한을
보여주려고 할때는 결국은 무와 혼란이 답이 될뿐이며 바로 여자아이들이 서로의 손가락에서 손가락으로 실을 건내주며 강물이나 거북이등 여러 가지 실의 모양을 변화하여 즐기는<실놀이>의 그것처럼 결국은 실을 엉키게 하고 인간의 시간을 엉키게 하여 그것이 사회이고 소설이고 인생이라면 프랑스의 작가 부르스트에<시간이라고 하는것을 모두 알면서 나는 전연 인생이라 하는것을 이해하지 않는다..> 등은 고백하지는 않았을것이라.
これまで支那の兵士が傘をさして戦争をするといふ悠長さを、何か不可解な謎のやうな愚かしき人格と笑つてゐたものであつた、然し日本の兵隊も、人と人との関係に於ては、支部の軍人に優勝してゐるが、支那大陸の雨や泥濘には全く参つてゐるやうだ、若し長期抗戦が文字通り実現するとすれば、傘をささうが、長靴を履かうが、日本の兵士も勝たなければならない理由のためには、姿、恰好のことはいつてゐられないだらう。
이제까지 시나의 병사가 우산을 쓰고 전쟁을 한다고 하는 유장함을 무언가 불가해한 수수께기와 같은 어리석은 인격이라고 웃어 본것이며,그러나 일본의 군대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지부의 군인에게 승리해 있으나 지부대륙의 비나 진흙창에 완전히 들어가 있는듯하나 만일 장기항전이 문자 그대로 실현되다 하면 우산을 쓸것인가 장화를 신을것인가가 일본의 병사도 이기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를 위해서는 그 모습이 딱 맞다고는 할 수가 없을것이다.
ここでは支那の兵士の珍妙な恰好も、自然との関係に於ては肯定しなければならない、傘の謎はさうして解けたが、支那人の大きな茫漠とした性格も、彼と自然との関係に於て、漸次そのやうに解けてくると思ふ。
여기서는 지나의 병사의 진묘한 모습도 자연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긍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우산의 수수께끼는 그처럼 풀리나 지나인의 커다란 망막한 성격도 그와 자연과의 관계에서 점차로 그렇게 풀리어 온다고 생각한다.
支那人の道徳的な輪廓が不分明であるといふところから、一口にキメつけてしまふことは考へものだ、支那兵が退却のとき、死者の上着も、長靴もひつぺがして逃げるといふ掠奪の性格も、死者に加へられるとき一層惨忍性を帯びるが、ロシアの現実にはもつと徹底したのがある、トルストイの小説『三つの死』の中では死にかけて暖炉の上に呻いてゐる老人に向つて、若い馭者セリォージャが『お前さんはどうせ永いことはないし二度と履くやうなことはあるまいから』と老人の長靴を貰ふ予約をするところがある、まだ生きてゐる人間からでもその通りである。
지나인의 도덕적인 윤곽이 불분명하다고 하는 점에서 ,한마디로 결정해버리는것은 생각해 보아야 할것이나, 지나병사가 퇴각시에 죽은자의 웃옷과 장화를 벗겨서 도망간다고 하는 약탈의 성격도 죽은자에게 가해지는 잔인성을 띠지만 러시아의 현실에는 훨씬 철저한것이 있으며 톨스토이의 소설<세개의 죽음>에서는 죽음에 임하여 난로위에서 신음하고 있는 노인을 향하여 젋은 마부 세료자가<당신은 어차피 오래 살수는 없으니 두 번 다시 몸에 걸칠수는 없으니>하면서 노인의 장화를 얻을 예약을 한일이 있는데 아직 살아 있는 인간에서도 그대로 이다.
まして支那人が死者から剥ぐことは、彼等にとつて当然なことであらう、その道徳の正しい、正しくないといふ問題でない、複雑だといふ意味で彼等は日本人よりも大粒の運命をもつてゐる、いまではそれを我々が理解することが、彼等に勝つことだらう。
더욱이 지나인이 죽은자에서 뺏은것은 그들에 있어서 당여한 일일것이고 그 도덕의 바르고 바르지 못한다고 하는 문제가 아닌,복잡하다고 하는 의미에서 그들은 일본인보다도 대단히 커다란 운명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으로서는 그것을 우리들이 이해함이 그들을 이길수가 있을것이다.
支那人の惨忍な行為も、解答は簡単である、曰く『物資の欠乏』が人間の心を浅ましくしただけである、北海道で寒中放牧されてゐる馬は、餌に窮すれば、苦しまぎれにお互の尻尾を喰ひ合ふやうなものだ、馬の道徳を論ずるときもまた物資の欠乏が問題となる。
지나인의 잔인한 행위도, 대답은 간단하며 이른바 <물자의 결핍>이 인간의 마음을 약삭빠르게 한것뿐이며, 홐카이도에서 寒中放牧되고 있는 말은, 사료가 궁하면 미친듯이 서로의 꼬리를 이빨로 갉아먹는듯한데, 말의 도덕을 논할때도 또 물자의 결핍이 문제가 된다.
議会の質問の中で西尾前代議士が『ファシズム陣営では立憲政治を自由主義なりと評してゐる、内相の所見如何――』と内務大臣に質してゐた、長生きはしたいものである、何故なら何事にも自由主義を附して責められるといふ時代は珍らしいから――、それは褌が猿又を自由主義だと罵ることもできるし、刀の中味と鞘との関係でも、鞘は中味に向つて邪魔だとこぼすと、反対に中味は鞘に窮屈だと罵るやうなものだ、結局刀の場合の自由主義は完全な抜身だが、さすがに日本の歴史には自由主義の段階が豊富とみえて、切れもしない竹光などをさして平気であるいた刀の自由主義時代もあつた。
의회 질문중에서 니시오마에 代議士가<파시즘 진영에서는 입헌정치를 자유주의라고 평하고 있으며,内相의 소견여하->라고 내무대신에 질하고 있으며, 장생은 하고 싶은것인데 왜냐하면 어떤일에도 자유주의를 附하여 추궁당하고 있는 시대는 귀한것이기에--, 그것은 기저귀가 사루마따를 자유주의이다 하고 욕을 하고 있는듯한 것이니 결국 칼의 경우의 자유주의는 완전한 칼등이나,과연 일본의 역사에는 자유주의의 단계가 풍부하다고 보이며 자르지도 않는 竹光등을 베어서 태연하였던 칼의 자유주의 시대도 있었다.
これも長生きの値打ちものだが、次いで西尾前代議士は内相に『資本主義の放任は共産主義の温床ではないか――』と質問すると、内相は『資本主義も極端となれば、共産主義の温床になり得ると思ふ』と答へてゐる。
이것도 장생의 계산인것인데 이어서 니시오마에 代議士는 내상에게<자본주의의 방임은 공산주의의
온상은 아닌가??> 라고 질문하자 내상은<자본주의도 극단이 되면 공산주의의 온상이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답하고 있다.
私が代議士なら内相の処に、この質問をもつてゆくお門違ひをやらない、これは内相ではなく、農相に質ねたいところだ、この『温床論』は政治の問題といふよりも『花卉栽培』に関する討論に属するからで、大体温床なるものの性質は、苗をその中に永久的に植ゑてをくべきものではない、適当な時季に苗は移植されねばならない、資本主義の温床で育つた共産主義の苗を、政府がまさか移植するやうな親切は絶対にやるまいから、その点で温床論は問題になるまい。
내가 代議士라면 내상의 위치에서 이 질문을 들고 나가 실수를 하지 않으며 이것은 내상이 아니고
농림장관에 질문을 하고 싶은 점이며, 이 <온상론>은 정치의 문제라기 보다도<화분재배>에 관한 토론에 속하기에 대체온상인것의 성질은 ,묘를 그 속에 영구적으로 심어 놓는것은 아니며,적당한 시기에 묘는 이식되지 않으면 안되며, 자본주의의 온상에서 자라난 공산주의의 싹을 정부가 정말로 이식하려 하는듯한 친절은 절대로 안되니 그 점에서 온상론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強いて我が国から温床を求めれば、それは決して政治家の目のとどくやうな手近なところにではなく、民衆の生活の深淵の中にあらう、ドストヱフスキイや、アンドレーフなどはその深淵から人間を引出してきた。
나아가서 우리나라에서 온상을 구하면,그것은 결코 정치가의 눈이 닿는듯한 가까운곳에서는 아니고
민중의 생활의 심연속에 있을것이니 도스토에프스키나 안드레이프등은 그러한 심연에서 인간을
끄집어 낸 것이다.
その一見異常な作中人物達は、それこそ民衆の特殊な生活地域からの選ばれた性格をもつて登場してゐる、政治家の想像の中の温床から生れてくるものは、たかだか常識の発達しそこねた化物位で、懲罰委員会にでもかければいつぺんに黒白の決する代物であるが、民衆の深い暗いところからは何が飛び出すか予想がつかない。
그러한 일견 이상한 작중인물들은 그것이야말로 민중의 특수한 생활영역에서의 선별된 성격을 가지고 등장하고 있는,정치가의 상상속의 온상에서 태어난것은 더욱더 상식의 발달에 손해를 입히는 화학물질 단위로,징벌위원회에 맡긴다면 일방적으로 흑백논리로 결정하는 대물이나 민중의 깊고 어두운곳에서는 무엇이 튀어 나올까가 예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死なう、死なう』と叫びながら帝都の随所で、腹を切りまはつた可笑しな宗教『死なう団』などは、その暗黒の温床から不意に明るみにとびだした一つではあるが、『死なう』などとか『生きよう』などとか、前文句たつぷりのキザな行為からは、真個(ほんと)うの『異常なもの』は感じられない。彼等は常識的にちよつと許り腹に刀をあてて、ちよつと許り赤いものをみて気が済んだのである。
<죽지마,죽지마>라고 외치면서 帝都 도처에서 배를 갈르는 가소로운 종교<죽지마단>등은 그 암흑의
온상에서 불의에 밝은곳에 튀어 나온 하나이기는 하나,<죽지마>등이나<삽시다>등이, 앞의 문구 듬뿍의 엄숙한 행위에서는,진실한<이상한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은 상식적으로 조금은 허락을 맡고 배에 칼을 댓으며 조금 허락을 맡고 붉은 것을 보고 마음이 안정된 것이다.
アパートにステッキが暴れ込んだのでドアは身を退いた、するとステッキがドアに強くはさまれて、この二つのものは、やつさもつさと押したり引いたりして争つた。アパート襲撃事件も最近起きたが『帝都治安維持に関する緊急質問』などといかめしく内務大臣の責任とまでもつていかずに、ドアの修理は家具屋にでも頼んでケリをつけたらいいのだ。
아파트에 스테이크가 침입하였기에 門은 몸을 뒤로 뺏으나 순간 스테이크가 도아에 강하게 끼어서
이 두개의 물질은 야단스럽게 밀고 당기고 하면서 싸웠다. 아파트 습격사건도 최근 일어났으나 <서울치안유지에 관한 긴급질문>이라 하면서 단호하게 내무대신의 책임이라고 밀고 나가지 않고 도아의 수리는 가구점에서라도 의뢰하여 결말을 짓는다면 좋은 것이다.
庶民の世界では、もつと異常な深刻な哀れな事件も起きてゐるが、夜濡らした枕は朝には乾いてゐるから、いちいち政府にまで尻をもつていけない階級は、泣き寝入りで済ましてゐる。
서민의 세계에서는 더욱 이상하고 심각하며 슬픈 사건도 일어나고 있으나 밤에 흠뻑 젖은 베개는 아침이 되면 말르기에 하나 하나 정부에까지 엉덩이를 가지고 가지 않는 계급은 흐느껴 울면서 잠을 자버리고 마는 것이다.
作家は政府の眼の届かないところから真実を引き出して国民としての作家的義務を果たさなければなるまい、作品の中の異常な人物、それは今後の作家の愛情を傾けて描写していい主人公である、どのやうな銀行や会社や、商店にでも、一人や二人は独特な特長的な人物はゐるものだ、そして愉快なほど異常な社会的な性格を具備してゐる筈だ、然もこれらの人物はすこぶる自然な型で、椅子に腰かけてゐる、周囲の者がこの種の人物を、とかく見落しがちなのは、すべての人々も多少異常になつてゐるからだらう。
작가는 정부의 눈이 미치지 않는곳에서 진실을 끄집어 내어 국민으로서의 작가적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되며, 작품속의 이상한 인물 그것은 이후의 작가의 애정을 담아서 묘사해도 좋은 주인공인, 어떠한 은행이나 회사,상점에서도 한사람 두사람은 독특하고 유별난 인물은 있는것이며,그리고 유쾌할정도로 이상한 사회적인 성격을 구비하고 있어야 할것이고 더욱이 이러한 인물은 대단히 자연적인 형태로 의자에 앉아 있으며 주변 사람들이 이러한 종류의 인물을 이러니 저러니 아래로 보고 무시하는것은 모든 사람들도 다소 이상하게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ロシアの小説に、ある男がいまは自殺するばかりになつて残してをいた一挺の拳銃(ピストル)のほかには、一物もなくなつて賭博場に足を運ぶ、賭ける金がないかはりに、敗けたらピストルで掌を撃ち抜くといふ約束で賭博を始めた、彼は幸ひに勝つて沢山の金を得た、相手は『お前は勝つたから平気な顔をしてゐるが、もし敗けたら手を撃つやうな約束は果すまい――』といつた。
러시아의 소설에 어느 남자가 당장에 자살할지경이 되어서 남겨 놓은 한자루의 권총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게 되어 도박장으로 발길을 돌려 도박에 걸 돈이 없지만 진다면 권총으로 손바닥을 관통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도박을 시작했으며,그는 운 좋게 이겨서 많은 돈을 얻었고 상대는<당신 이겨서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만일 졌다면 손을 관통한다는 약속은 지키지 않았을것이야..>라고 말을 하였다.
彼は答へて『わしは決してそんな不真実な男ではない、わしは勝つてはゐるが、約束通りにしよう――』かういつて手に拳銃を発射して立去つたといふ話がある。
그는 대답으로<나는 결코 그러한 불진실한 남자는 아니야,나는 이기기는 하였으나 약속대로 하지...>
이렇게 말라고 손에 권총을 발사하고는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愚直とも思はれるこの人間の行為の中には、真実を愛するといふ珠玉のやうな尊いものがある、正しいことの証明の為には、非妥協的態度で、己の肉体も平然と撃ちぬくといふ性格が、もしロシア人の一般的な性格だと仮定すれば、怖ろしいのはロシアの飛行機の数でもなく、機械化部隊でもない、これを扱ふ人間の性格であらう。
우직하다고 할 이러한 인간의 행위속에는 진실을 사랑한다고 하는 주옥같은 위대한 면이 있으며,바른것에 대한 증명을 위하여서는 비타협적 태도로 자신의 육체도 태연하게 뚫어낸다고 하는 성격이 만일 러시아인의 일반적인 성격이라고 가정하면 무서운것은 러시아의 비행기의 숫자가 아니고 기계화부대도 아니고 이것을 다루는 인간의 성격일것이다.
日本人はロシア人に劣らない誠実を愛する国民であつた筈だ、歌舞伎の良さは、舞台に展開される真実の求め方の強烈さにある、芸術や政治が現実探究は二の次にして、何よりも当面の安全第一の行き方に帰するときは、巴里の或る詩人の詩のやうに『乗合に乗れ、地下鉄(メトロ)は怖れ怖れよ、身を守ることに限りはなし……』と、何よりも保身第一になる。
일본인은 러시아인에 밀리지 않는 성실을 사랑하는 국민이었을것이며,카부끼의 장점은 무대에 전개되는 진실을 구하는 방식의 강렬함에 있으며 예술이나 정치가 현실탐구는 二次로 하고 무엇보다도 당면한 안전제일의 목적에 돌아갈시는 파리의 어느 시인의 시처럼<승용차를 타세 지하철은 너무 무섭네 몸을 지킴에 한계가 없으니...>라고 무엇보다도 보신제일이 된다.
そこには強い政策も、強い芸術も生れはしない、議会で大臣の答弁の結びの言葉には、『御尤である』『その点については考慮する』『万遺憾なきを期したい』『将来万全を期したい』『慎重に考ふべき問題である』『御説には賛成である』等々といつた種類の言葉がまことに多い。
거기에는 강한 정책도 강한 예술도 태어나지는 않고 의회에서 대신의 답변의 연결언어에는,<훌륭하네><그점에 대해서는 찬성이야><전적으로 유감없음을 기하고 싶군><장래 만전을 기하고 싶네>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그 설에는 찬성한다> 등등 말을 하는 종류의 언어는 정말로 많다.
これらの言葉の内容を吟味してみても、言葉の性格は何等発見できない、この漠とした答へ方は、誰の答へた言葉であるか、国家の答へた言葉であるか、政府委員の言葉であるか、個人としての言葉であるか、恐らくこの三つの間をゆらゆらと動揺した『或もの』の答へた言葉であらう、可笑しなことには、勢ひたつて質問戦に乗りだした代議士も、大臣のこの最後の結びの言葉で、すつかり気を良くして質問を打切るらしい、作用が感覚なりとすれば、この結びの言葉のなす作用が質問者の感覚をなごやかにするらしい。
이러한 언어의 내용을 음미해 보아도,언어의 성격은 하등 발견할 수가 없고, 이러한 막연한 대답은 누가 대답한 언어인가? 국가가 답변한 말일까? 정부위원의 언어일까?개인으로서의 언어인가? 아마도
이러한 세가지 사이를 흔들 흔들하면서 동요한<어느것>이 답한 언어일것이고 가소러운것은 기를 쓰고 질문전에 들어간 代議士도 대신의 이 최후의 연결언어에서 완전히 기를 회복하여 질문을 끊어내는듯한 작용이 감각으로 된다면 이러한 연결언어가 되는 작용이 질문자의 감각을 온화하게 한것일것이다.
人間は愛すべきものだ、この他愛のない甘さの中で、政治は順調に、議事はすすめられてゆく、地方出身の代議士が、議政壇上にのぼつて、一語、二語、政府に質問したとき、大臣が『御説には同感である――』といつた。
인간은 사랑하여야 할 존재이며 이러한 他愛가 없는 달콤한속에서 정부는 순조럽게 議事는 권유되어
가고 지방출신의 代議士가 의정단산에 올라가서 한마디 두마디 정부에 질문을 했을 때 대신이<동감이요>라고 말하였다.
何といふ驚くべき光栄であるか、大臣が同感であるなどといふことは――、この大臣の言葉だけでも郷党への、良き最大の土産にならう、予約出版にさへ保証金が要るのであるから、政治家の『将来万全を期したい』といつた国家や国民に対する予約の言葉にも、何かの形で保証が欲しい、然しこれらの予約語は、随分永い間反覆されてきただけのやうに思ふ、パイプオルガンを歌つたフランスの詩に
무어라 하여야 할 놀라운 영광인가? 대신이 동감이다라고 말함은, 이대신의 언어만으로도 향당에의, 좋은 최대의 토산품이 되며 예약출판에조차 보증금이 필요하기에 정치가의<장래만전을 기하고 싶다>라고 하였던 국가나 국민에 대한 예약의 언어에도 무언가의 형태로 보증하고 싶으며,그러나 이러한 예약어는 상당히 오랜 동안 반복되어왔을뿐인것처럼 생각하며 파이프오르간을 노래한 프랑스의 시에..
そは不可解な音楽
嘔吐催させ微酔を齎し
そして吾等を五月蝿がらす……
されど、つまりは馴れるなり。
소(솔)은 불가해한 음악
구토하고 싶고 微酔를 齎하며
그리고 우리들을 성가십게 하나
그래도 결국은 길들여질것이다.
といふのがある、政治もただ騒がしいパイプオルガンであれば、政治行為も言葉も、反覆だけでは、『されどつまりは馴れるなり』であらう、然し近来の政治の性格も変つてきた、人民の性格も非常に変つてきたやうに思ふ、誠実を愛するといふ性格が露き出しになつてきた、人民が政治に対する眼の注ぎ方は、曾てのやうに焦点を失ふことはなく、微細なその動きをも知らうとする意慾がある、強い人民の注視や環[#「環」に「ママ」の注記]視の中で行はれる政治は、いやでも公明と誠実の政治たらざるを得ないだらう。
라고 하는 구절이 있는,정치도 그저 시끄러운 파이프오르간이라면 정치행위도 언어도 반복만으로서는<그래도 결국은 길들여질것이다>일것이며, 그러나 근래의 정치의 성격도 변해왔으며 인민의 성격도 대단히 변해온것처럼 생각하며 성실을 사랑한다고 하는 성격이 노출되었으며 인민이 정치에 대한 눈의 시선은 과거와같이 초점을 잃는 일은 없고 미세한 그 움직임도 알고자 하는 의욕이 있으며 강한 인민의 주시나 環視속에서 행해지는 정치는 설사 그렇지는 않을지라도 공명과 성실의 정치가 아니면 안될것이리라.
池袋モンパルナス
池袋 Montparnsse
池袋から長崎町にかけては、芸術家と称される種族が住んでゐる。それと並行的にダンサー、キネマ俳優など消費的な生活者に、無頼漢、カトリック僧侶など異色的人物を配し、サラリーマン、学生等が氾濫してゐる、地方人の寄り集りであるこの植民地東京の中でも最も人種別においてバラヱテーに富む池袋附近は、従つて東京人の精神的機構を語る材料がタップリある。なかでも神経質をもつて売物とする芸術家の生活において、脳の働きと心臓のチックタックの状態が醸し出す不思議な雰囲気は恰も巴里の芸術街モンパルナスを彷彿させるものがある。池袋からバスで五分の長崎町に、『桜ケ丘パルテノン』といふハイカラな名称を付けたアトリヱが六十軒ほど群をつくつてゐる一画がある。
月が青色ペンキの塗りたてのアトリヱに、丁度ロシアの白夜を思はせるほど明るく反映してゐる夜であつた。パルテノン近くの原つぱで、大きな物の砕ける音がした、見ると一人の大男が美しいはだかの女を愛情と憎しみとの入りまじつた感情で、手にした棍棒で殴りつけてゐるのである。女は悲鳴もあげない、それは彫刻家が、展覧会に出品した女の立像を原つぱで玄能(げんのう)で砕いてゐるところであつた。
池袋<이께부꾸로)에서 長崎町(나가사끼쬬오)에 걸쳐서는 藝術家라 稱해지는 種族이 살고 있다.그것과 竝行적으로 dancer,kinema俳優등 消費적인 生活者에 無賴漢,catholic僧侶등 異色的人物을 配하여
salaryman,學生등이 氾濫하고 있으며 地方사람이 모여드는 이 植民地東京중에서도 가장 人種別에 있어서 variety가 豊富한 池袋부근은 따라서 東京人의 精神的機構를 말하는 재료가 듬뿍 있다.그중에서도 神經質을 가지고 賣物하는 藝術家의 생활에 있어서 腦의 활동과 心臟의 똑딱~을 조성하는 이상한 분위기는 흡사 Pari의 藝術街 Montparnsse를 彷佛케하는것이 있다.池袋에서 bus로 오분되는
長崎町에 <桜ケ丘 Partenon>이라고 하는 High collar한 名稱을 붙인 atelier가 六十軒정도 무리를 만들고 있는 한 구역이 있다.
달이 靑色 paint로 갓칠한 atelier에 마치 Russia의 白夜를 생각하게 할정도로 밝게 反映하고 있는 밤이었다.Partenon 가까운 들판에서 커다란 물건을 부수는 소리가 났으며, 보니 한 체격이 큰 남자가 아름다운 벌거숭이 여자를 愛情과 미움이 뒤섞인 感情으로 손에 든 棍棒으로 후려갈기고 있는것이다.여자는 비명도 지르지 않으며 그것은 彫刻家가 展覽會에 出品한 여자의 立像을 들판에서 쇠망치로 부수고 있는것이었다.
立像は帝展で賞をもらつた優秀作であつたが、日夜精根を凝らして作りあげた彫像も、展覧会がすんでしまへば、それは売れもせず飾つておくには場所ふさぎに大きなものであり、いろ/\の意味から、仕末にをへない『ただの土の塊り』にすぎなかつた、彫刻家K氏はいつも展覧会がすんで、作品がもどつてくると、かうして作品を砕いてしまふのであつた。芸術家の作品に対する愛情がどんなに深いものであるか、そのことを知つてゐるものだけが、自分が造物主となつて作りあげた女の顔に、手にした玄能を加へる、哀切と悲痛の感情を知つてゐるだらう、『売れもせず、ただ制作するだけ』の生活はこの彫刻家だけの生活ではなかつた、大部分の画家や彫刻家、小説家、詩人達のすべての生活状態であつた、この彫刻家が彫像を粉々に砕いて、その女の形を自然物である土壌にかへすやうに、ある画家は百五十号のカンバスを折つて焚木にしてしまふ、めらめらと燃えあがる画布や枠にはテレピン油や油絵具がしみてゐて、たいへん良く燃えるのであつた。
立像은 帝展에서 賞을 받은 優秀作이었지만 밤낮으로 精力과 氣力을 다하여 완성한 彫像도 展覽會가
끝나 버리면 그것은 팔지도 않고 장식해 놓기에는 場所를 차지함에 커다란것이며 여러 가지 의미에서 다루기 어려운<그저 흙덩이>에 지나지 않았으며 彫刻家 K씨는 항상 展覽會가 끝나고 작품이 돌아오면 이렇게 작품을 부셔 버리는것이었다.藝術家의 작품에 대한 愛情이 얼마나 깊은것인가?그것을
알고있는자만이 자신이 造物主가 되어서 만들어낸 여자의 얼굴에 손에 든 쇠망치치를 加 하여 哀切과 悲痛의 감정을 알고 있을것이며 <팔지도 않고 그저 制作할뿐>의 생활은 이 彫刻家만의 생활은 아니었으며 대부분의 畵家나 彫刻家,小說家,詩人들의 모든 생활상태였으며 이 彫刻家가 彫像을 가루로 부수고 그 여자의 형태를 自然物인 土壤에 돌려보내는것처럼 어느 畵家는 百五十號의 canvas를
꺽어서 땔감으로 해버리고 활활 타오르는 畵布나 틀에는 테레핀油나 그림물감이 스며 있어 대단히 잘 타는것이었다.
さうした自作を虐待する芸術家たちはまだしも勇気のある部類に属する、砕くに自作なく、裂くに自作ない、彫刻家や画家が、展覧会のない期間を、ぼんやりとアトリヱに昼寝して暮らす者もまた少くない、しかしこれらの時代の哀愁組、朗らかな外面をもつてゐて悲しい現家[#「現実」の誤記と思われる]を知つてゐる連中も、夕方になるとまるで人間が違つたやうに活溌に動き出す。
遠く池袋の空が夜の光りを反映して美しく見える頃、画家達はパチリパチリとアトリヱの電燈を消して長崎町から、池袋へ出かけて行く、特別の用事があるわけではなく、ただ遠くの手がさし招くままに、足がふらふらとその方に向いて行くのである。
그러한 自作을 虐待하는 藝術家들은 그래도 용기가 있는 部類에 속하며 부수는데 自作없이 찢는데
自作 없는 彫刻家나 畵家가 展覽會가 없는 기간을 멍하니 atelier에서 낮잠을 자고 지내는자도 또
적으며 그러나 이러한 시대의 哀愁組,명랑한 外面을 갖고 있어 슬픈 現家를 알고 있는 무리도 저녁
이 되면 완전히 인간이 달라진것처럼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멀리 池袋의 하늘이 밤의 불빛을 反映하여 아름답게 보일 무렵 畵家들은 톡~톡~하고 atelier의 電燈을 끄고 長崎町에서 池袋로 나가서 특별한 일이 있는것은 아니고 그저 멀리 손이 가리키며 끄는대로 발이 비슬비슬 그쪽을 향하여 가는것이다.
池袋モンパルナスに夜が来た
学生、無頼漢、芸術家が街に
出る
彼女のために、神経をつかへ
あまり太くもなく、細くもない
ありあはせの神経を――。
池袋 Montparnsse에 밤이 왔다
學生,無賴漢,藝術家가 거리에
나온다
그녀를 위하여 신경을 쓰고
너무 두껍지고 않고 가늘지도 않은
모든 神經을____.
私はさういふ状態を、詩につくつた、そしてその詩篇を傍らの音楽をやつてゐる友人に手渡した。
音楽家M君は十九歳であつた、彼は私の三百行程の叙事詩『プランバコ中隊』を交響詩に作曲してくれてゐる人であつた、真面目な作曲の間に、フランス風なデカダンスを織り込んで退屈しのぎをしようとして、M君は喜んでものの三分とも経たない間に『池袋モンパルナスの歌』といふものを作曲した。
私達はこの歌を口ずさみながら、池袋へ向かふ立教大学前の広いアスファルト路を歩いてゐた、豊島師範の塀に沿つた歩道に一人の青年が、ペタリと地べたに坐つて、通行人の一人一人に向つてバッタのやうに頭を下げてゐた。
女学生は驚いて飛び退くし、奥様風の女は胡散臭さうに路を避けた、分別臭い勤人風の男は、さうした出来事にも少しも心を動揺させず、学生達はこの髪の長い若い男のやることに、何かしら好感の眼を投げかけて通り過ぎた、私がこの通行人にお低頭をしてゐる男の顔をみると、それが友人のNであることが判つた。
나는 그러한 상태를 詩로 만들었으며 그리고 그 詩篇을 옆의 音樂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 건네주었다. 音樂家 M君은 열아홉살이었으며 그는 나의 三白行 정도의 敍事詩<プランバコ中隊>를 交響詩로 作曲해 주고있는 사람이었으며 진지한 작곡중에 France風의 Decadence를 짜넣어서 심심풀이를 하려고 하여 M君은 기뻐하였으며 삼분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池袋 Montparnsse의 노래>라고 하는것을 作曲하였다.
우리들은 이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池袋호 향하는 立敎大學앞의 넓은 아스팔트길을 걷고 있었으며 豊島師範 벽에 따르는 步道에 한 청년이 털썩 땅바닥에 앉아서 通行人 한사람 한사람을 향하여 打者처럼 머리를 내리고 있었다.
여학생은 놀라서 물러서고 主婦風의 여자는 수상한듯이 길을 피했으며 아주 分別있는체하는 직장인風의 남자는 그러한 일에도 조금도 마음을 動搖하지 않으며 학생들은 이 머리가 긴 젊은 남자가 하는짓에 뭔가 好感의 눈을 던지면서 지나갔으며 내가 이 通行人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니 그것이 친구인 N인것을 알았다.
彼はたいへん酔つてゐるのだ、そし何か同じやうな言葉を幾度も繰り返してゐるやうであつた、その言葉は『済みません、済みません――』といつてゐるのだ、彼は橋の上の高山彦九郎のやうな恰好で、通行人に向つて済みません、済みませんと手を地面について謝罪してゐるのだ、何が済まないのか、いかに泥酔してゐるとはいへ、彼の人生にとつて地べたで通行人に謝罪する程悪いことでもあつたのか、『おい、N君何をペコペコ謝まつてゐるのかね、服が汚れるよ、立ち給へ――』と私は彼を抱へるやうにした、しかし彼はフト顔をあげたが、彼の眼は充血し、唇は震へてゐて、口からは泡盛の臭い毒気を吐いてゐた、知人の顔を識別する力はもうなかつた、Nは又私に向つても『済みません、済みません』と繰り返へすばかりであつた、見ると彼は泣いてゐるのだ、地べたの土埃りの上に、折々鼻を押し附けながら、そこで鼻水と土とをまぶしつけ、そいつを洋服の右の袖口が、ぴかぴかに光るほどこすり附けるのであつた。
그는 상당히 취해 있었으며 그리고 뭔가 똑같은듯한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는듯 하였으며 그 말은<미안합니다!미안합니다!___>라고 말하고 있는것이며 그는 다리 위의 高山彦九郎(타까야마히꼬쿠로오)같은 모습으로 通行人을 향하여 미안합니다!미안합니다!하며 손을 地面에 대고 謝罪하고 있는것이며 뭐가 미안한지?아무리 滿醉하고 있다 하여도 그의 人生에 있어서 땅바닥에서 通行人에게 謝罪할정도로 나쁜짓이라도 있었던가?,
<어이!N君!뭣을 굽실굽실 사과하고 있는가?옷이 더러워져!일어서게!___>하고 나는 그를 안을듯이 했으며 그러나 그는 문득 얼굴을 들었지만 그의 눈은 充血하고 입술은 떨고 있으며 입에서는 燒酒냄새의 毒氣를 뿜고 있었으며 知人의 얼굴을 識別할 힘은 이젠 없었고 N은 또 내게 향해서도 <미안합니다!미안합니다!>하고 반복할뿐이었으며 보니 그는 울고 있는것이며 땅바닥 먼지위에 가끔 코를 눌러 대면서 그리고는 콧물과 흙을 묻혀서는 그것을 양복 오른쪽 소맷부리가 반짝반짝 빛날정도로 문질러 대는것이었다.
私はその場を去つた、Nの理由はだんだんはつきりしてきた、『済みません――』私は彼の言葉を反覆してみながら、その言葉のもつ意味を探しださうと努力した、するとNといふ洋画家の不遇な画壇の経歴が浮んできた、彼は十九歳か二十歳で帝展に初入選した、当時この年齢的な弱冠さで、帝展入をした才能は驚嘆と栄誉そのものであつた、その翌年も入選し、彼の絵はパトロンもつき、飛ぶやうに売れた、しかしどうしたことだ、三年目から彼の絵は鎧戸でもおろされたやうに帝展から拒否されてしまつた、落選に次ぐ落選、人々の期待に反して、曾ての若い天才は、凡俗の泥の中に乱酔と苦悩の日夜を送り始めた、何故彼が帝展にいれられなかつたか、それは明瞭であつた、彼の芸術上の良心が目ざめたとき、アカデミーに叛逆を始めたのだ、如何なる形においても、叛逆するものは呪はれる運命が待つてゐる、Nもまた帝展に反撥した瞬間に地獄に陥ちたのだ。
数年間はどこにも出品しなかつた、漸くこの二年来独立展に出品を始めた、混乱と矛盾をもつて画風とする、独立一派は彼の住み場所にふさはしい、しかし尚且つ彼は泡盛やスタンドのグラスから酒精分に充ちた液体を己れの口に注ぐとき、彼の脳は突如ススリ泣きを始める『おれは天才であつた、おれは皆に期待された、おれはあいつや、あいつよりも立派な画をかいてゐた――ところで現在のおれは――』
酒は一気に深い反省の淵に彼を叩きこんだ、朦朧と酔つた彼は街に歩きだした、天と地と、自然と人間と、あらゆる彼をとりまく一切のものが、自分に鞭を加へてゐるかのやうな自責と悔恨が襲つてきた、彼はぴたりとその場に坐りこんだ、ぼうとした霞んだ彼の眼の前を通る一切のものに『済みません、済みません』と謝罪と懺悔の繰り言を述べ、鼻水をもつて、しきりに夜のアスファルトの埃りをすすりあげるのであつた。
나는 그곳을 나왔으며 N의 이유는 점점 확실해져 왔고 <미안합니다!__>나는 그의 말을 반복해 보면서 그 말이 갖는 의미를 찾아내려고 노력했으며 허자 N이라고 하는 洋畵家의 不遇한 畵壇의 經歷이 떠올랐으며 그는 열아홉인가 스무살에 帝展에 初入選하고 당시 이 年齡적인 弱冠으로 帝展에 入選한 재능은 驚歎과 榮譽 그 자체였으며 그 다음해도 入選하여 그의 그림은 patron도 생겨 날개돚히듯이 팔렸으며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삼년째부터 그의 그림은 shutter라도 내릴것처럼 帝展에서 拒否되어 버렸으며 落選에 이어 落選,사람들의 기대에 反하고 예전의 젊은 天才는 凡俗의 진탕속에 亂醉와 苦惱의 나날을 보내기 시작했으며 왜 그가 帝展에 들수가 없었던가?그것은 明瞭하였으며 그의 예술상의 良心이 눈떳을때 Academi에 叛逆을 시작하였으며 어떠한 형태에 있어서도 叛逆하는것은 저주받을 운명이 기다리고 있으며 N도 또 帝展에 反撥한 순간에 地獄에 떨어진 것이다!
수년간은 어디에도 出品하지 않았으며 점점 이 이년이래 獨立展에 出品을 시작했으며 混亂과 矛盾을 가지고 畵風으로 하여 獨立一派는 그가 사는 장소에 어울리는 그러나 아직도 그는 燒酒나 stand의 glass에서 酒精分에 가득한 액체를 자신의 입에 부을때 그의 腦는 갑자기 흐느낌을 시작하는<나는 天才였다!나는 모두게게 기대를 받았다!나는 저놈이나 저놈보다도 훌륭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___헌데 현재의 나는___>
술은 一氣에 깊은 반성의 못으로 그를 꼬나박았으며 朦朧하게 취한 그는 거리로 걷기 시작하였고
하늘과 땅과 自然과 人間과 모든 그를 둘러싼 일체의 것이 자신에게 채찍을 가하고 있는것 같은 自責과 悔恨이 업습해 왔으며 그는 딱~그곳에 눌러앉았고 멍하니 뿌연 그의 눈앞을 지나가는 일체의 것에 <미안합니다!미안합니다!>하고 謝罪와 懺悔의 넋두리를 말하고 콧물을 가지고 자주 밤의 아스팔트 먼지를 훌쩍이는것이었다.
詩の黙讀性に抗して
詩が不用意な状態で作られるといふことは避けなければならないが、現在の日本の詩人の作品の殆んどが、この不用意な状態で作られてゐるといふ事実は否定することができない。偶発的な心理状態を探し求める神がゝりな詩人の生活位軽蔑されてよいものはなからう、さうした状態の作品は実に多く、これらの作品が一篇でも多く世に撒布されるだけ、一般民衆の詩に対する失望は大きくなつてゆく有様である。詩人の悪あがきが、詩人に色々の催しをさせたり、日本の詩の音声的問題といふ本質的な点を追求することをしないで、気軽に作曲家と手を結ぶといふやり方などが最近の傾向と言はれよう。
大熊信行氏が『文学の唯一の手段または媒体としての言葉なるものは、もはや現実の個人的な音声的な属性を漂白しさつたところの高度に客観的な別種の素材であり、作文はいはゞ神がゝりの状態でその素材をつづる――』と指摘してゐるが、この大熊信行氏のいふ文学の黙読性こそ、散文家にとつても問題であるが、詩人にとつては更に大きな解明しなければならない問題であらう。
詩가 準備되지 않은 상태로 만들어진다고 하는것은 피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현재의 日本 詩人의 作品의 거의가 이러한 準備되지 않은 상태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否定할 수가 없다.偶發的인 心理상태를 探究하는 神내린듯한 詩人의 생활만큼 輕蔑되어도 좋은것은 없을것이며 그러한 상태의 작품은 실로 많으며 이러한 작품이 一篇이라도 많이 세상에 撒布되는만큼 일반민중의 詩에 대한 失望은 커져가는 모습이다.詩人의 惡의 몸부림이 詩人에게 여러 가지 재촉을 하게하며 日本의 詩의 音聲적문제라고 하는 본질적인 점을 追求하는것을 하지 않고 가볍게 作曲家와 손을 잡는다고 하는 방법등이 最近의 傾向이라 말해질것이다.
大熊信行(오오쿠마 노부유끼)이 <文學의 唯一한 수단 또는 媒體로서의 언어라는것은 이미 현실의 개인적인 音聲적인 屬性을 漂白된곳의 高度에 객관적인 別種의 素材이며 作文은 소위 神내린 상태로 그 素材를 綴한다___>하고 지적하고 있지만 이 大熊信行이 말하는 文學의 黙讀性이야말로 散文家에 있어서도 문제이지만 詩人에 있어서는 더욱 커다란 解明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일것이다.
言葉が文字を仲介として、第三者に伝達されるやうになつてから、黙読に依る立場は全く言葉の音声的属性を失つたといふことができる、厳密の意味では、黙読も尚又物理的な意味では音声性を保有してゐる。然し文学が黙読の制約を突破して、思はず声を発せさせるといふ場合は今の処全くないと言つていゝ、極端にいふと、眼で書かれたものを眼に伝へるのである、詩の場合はこの黙読性に懐疑的でなければならないし、文字の機能、(視覚的であるとか、黙読的であるとか)への従属と格闘する用意がなければ、真の感性的な詩をつくることが不可能ではないのか、先頃我国にも散文詩型の詩が流行したことがあつたが、この散文詩型の主張の社会的立場といふものは、精神に飛躍的な新しい契機を捉へようと努める自由詩型詩人と全く反対の社会的立場から、それを主張してゐたやうである。散文よりも諧調的であつて、そして自由詩よりも諧調的でないといふこの散文詩型といふ詩型は、所詮詩と散文との中間的な混血児的な役割よりも果すことができなかつた。
언어가 文字를 仲介로서 제삼자에 전달되어지는 것처럼 되고나서 黙讀에 의존하는 입장은 완전히 언어의 音聲적인 屬性을 잃었다고 할 수가 있으며 엄밀한 의미로는 黙讀도 또한 物理的안 의미로는 音聲性을 保有하고 있다.그러나 文學이 黙讀의 제약을 突破하여 뜻밖에 소리를 發하게 한다고 하는 경우는 지금으로서는 전혀 없다고 하여도 좋으며 극단적으로 말하면 눈으로 씌여진것을 눈으로 전달하는것이며 詩의 경우는 이 黙讀性에 懷疑的으로 되지 않으면 안되며 文字의 기능(視覺的이라던가 黙讀的이라던가)에의 從屬과 格鬪할 준비가 없으면 진실한 感性的인 詩를 짓는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을까?예전에 우리나라에도 散文詩型의 詩가 유행한적이 있었지만 이 散文詩型을 주장하는 사회적 입장이라고 하는것은 精神에 飛躍的인 새로운 契機를 파악하고자 힘쓰는 自由詩型詩人과 전혀 반대인 사회적 입장에서 그것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같다.散文보다도 諧調的이었으며 그리고 自由詩보다도 諧調的이 아니라고 하는 이 散文詩型이라고 하는 詩型은 결국은 詩와 散文과의 中間的인 混血兒적인 役割보다도 達成할 수가 없었다.
そしてこの散文詩型論者の一部は、自由詩型を避けて、まつすぐに新しい定型詩の主張をしたものである。自由詩を避けるといふ心理的なものは、自由詩型こそ最も詩型の完成として至難なそれ故に研究し甲斐のある詩型であることが、何よりもものぐさなこの連中をして自由詩型を避けさせたのである。
散文詩型や、定型詩論者は唯一の詩論の借用場所であるアランの散文論から、たくさんの文章を引いて自由詩形の何の必然性もないことを攻撃したが、この人々はアランの何処の部分から、何を引用したかといふことは問題であつた。彼等は主として詩に不利な部分を引抜いて、有利な部分を伏せておいて、その引用文で自由詩形を責めたのである、曰く『君等は何故、そのやうに行を分けるのか、何の必然性があつてさうするのか、行をつないでしまつても同じではないか――我々の散文詩形のやうに。』とよく言つたものである。
그리고 이 散文詩型論者의 一部는 自由詩型을 피하여 곧바로 새로운 定型詩의 주장을 했던것이다.自由詩를 피한다고 하는 심리적인 것은 自由詩型이야말로 가장 詩型의 완성으로서 至難한 그런 연유로 연구할 보람이 있는 詩型이라는 것이 무엇보다도 성가신 이 패거리들로 하여금 自由詩型을 피하게 한것이다.
散文詩型이나 定型詩論者는 唯一한 時論의 借用장소인 Alain의 散文論에서 많은 문장을 끌어내서 自由詩型에 아무런 必然性도 없는것을 공격했지만 이러한 사람들은 Alain의 어느 부분에서 무엇을 引用했는가 하는것은 문제였다.그들은 주로 詩에 不利한 부분을 빼고 有利한 부분을 엎어놓고서 그 引用文으로 自由詩型을 責했던것이며 가로사대<자네들은 왜 그처럼 行을 나누는가?무슨 必然性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가?行을 연결해버리지 않아도 마찬가지 아닌가?___우리들의 散文詩形처럼!>하고 흔히 말했던것이다.
然しアランは決して散文家のためにのみ散文論を書いてはゐない。散文と詩の区分に就いての有益な文章を書いてゐるのである。こゝでは詩の立場から擁護のためにも、詩を体系づけようと努力してゐるのである。特に散文の部分だけを引抜いて、詩を攻撃する具に利用した散文詩型論者は、今にしてみては、散文詩型や定型詩などが、社会的な存続の価値をもつてゐるものかどうか、身をもつて経験したであらう。
アランは『散文は継起の秩序(オルドル)に、語られた言葉を支配し、雄弁に於て、殊に詩に於て、形式上の一法則と確認されるこの継起の秩序に打勝たねはならぬと云へば十分であらう――。』と散文と詩との区別に就いて語つてゐるのは、将に詩型上の自由詩型そのものを主張した言葉であらう。継起の秩序とはいつたい何んだらうか、継起とは最も現実的な言葉である。例へてみれば海面上の波の隆起は、海にとつての継起である。そしてここに愚かな男がゐて大きな板で海の大小様々な形や高さの波を制へつけて、一定の波の高さにしようと企てるやうなものである。海の継起を板で秩序だてようとする愚昧な男は、人間の感情の自由な高まりを、散文詩型や、殊に定型などといふもので均さうとする愚かな詩人とよく似てゐるのである。
그러나 Alain은 결코 散文家를 위해서만 散文論을 쓴것은 아니다.散文과 詩의 구분에 있어서의 有益한 문장을 쓰고 있는것이다.여기서는 詩의 입장에서 擁護를 위해서도 詩를 體系지을려고 노력하고 있는것이다.특히 散文의 부분만을 빼서 詩를 공격하는 도구로 이용한 散文詩型論者는 지금에 와서 보면 散文詩型이나 定型詩등이 사회적인 存續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것인지 어떤지 몸으로써 경험했던것일거다.
Alain은<散文은 繼起의 秩序<order)에 말해진 언어를 지배하고 雄辯에 있어서 특히 詩에 있어서 형식상의 한 法則으로 確認되는 이 繼起의 秩序를 이기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면 충분할것이다___>하고 散文과 詩와의 區別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것은 장차 詩型上의 自由詩型 그것을 주장했던 말일것이다.繼起의 秩序라는것은 도대체 무엇일까?繼起라는것은 가장 현실적인 말이다.예를 들면 海面上의 물결의 隆起는 바다에 있어서의 繼起이다.그리고 이곳에 어리석은 남자가 있어서 커다란 널판지로 바다의 大小 여러 가지 형태나 높이의 물결을 制壓하여 一定한 물결의 높이로 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것 같은것이다.바다의 繼起를 널빤지로 秩序잡으려고 하는 蒙昧한 남자는 인간의 感情의 자유러운 高調를 散文詩型이나 특히 定型등이라 하는 것으로 均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詩人과 아주 닮아 있는것이다.
真の詩人は現実の諸々の継起の秩序に打勝たなければならないし、形式の上で自分のために手錠をつくることを欲しない。自由詩型が行のさまざまな長短や、横への配列を行ふのは、詩の上の一つの継起の表明であり、詩の長さはその詩にとつての現実の発展の時間的証明以外の何物でもない。私は長い叙事詩を書いたとき他人は『長すぎる――』と非難した。然し時間の証明に必要とする長さに、他人はそこから一行の詩もけづりとることが不可能なのである。
진실한 詩人은 현실의 모든 繼起의 秩序를 이기지 않으면 안되며 형식상으로 자신을 위하여 手匣을 만드는것을 바라지 않는다.自由詩型이 行의 여러 가지 長短이나 橫의 配列을 行하는것은 詩上의 하나의 繼起의 表明이며 詩의 길이는 그 詩에 있어서의 현실의 發展의 時間的證明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나는 긴 敍事詩을 썼을때 他人은<너무 길어!___>하고 非難하였다.그러나 시간의 證明에 필요로 하는 길이에 他人은 그곳에서 一行의 詩도 깍아내는것이 불가능한것이다.
俳句の短かさは、その短かさとしての『意味の休止』が特長であつて、意味の終つたところから俳句の現実が始まるといつても決して言ひすぎではない。それに反して俳句よりもより長い自由詩は、一行一行で俳句のやうな意味の休止を行ふことはしないのである。行が多くなるといふ、行の発展の必然性は、これらの第一行の表現の完成と同時に、第二行目に発展の契機をつくつてゐる、そして第二行目に詩がすゝんだとき、第一行目の最初の意味も変化してゐなければならない。一篇の詩を書きすゝめるときは、前途は予測し難いものであつても、過ぎさつてきた行、つまり過ぎ去つてきた時間は完全なものでなければならない。私の主張する自由詩型はその意味で、アナキスチックな自由詩人の詩型の乱雑な意味での自由性とは区別してゐる。正しい自由詩型は、行の発展の必然性は、現実の時間的な基礎に立脚したときだけ、その行の発展の必然性を認める。もし横合から偶然的な現実が襲つてきた場合は、これらの偶然性も表現の上で排除するのではなく、全体的な規模の上から、この偶然を必然へ転化させてゆく。予測し難い前方といつたのは、これらの偶然性の立ち現れを予定に入れた上での言葉である。
俳句의 짦은은 그 짦음으로서의 <意味의 休止>가 장점이며 의미가 끝난곳에서 俳句의 현실이 시작된다고 하여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니다.그에 반해서 俳句보다도 보다 긴 自由詩는 一行 一行으로 俳句과 같은 意味의 休止를 행하는것은 하지 않는것이다.行이 많아진다고 하는 行의 必然性은 이러한 第一行의 표현의 完成과 동시에 第二行째에 발전의 契機를 만들고 있으며 그리고 第二行째에 詩가 진행했을때 第一行째의 최초의 의미도 변화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一篇의 詩를 써 나갈때는 前途는 예측하기 어려운것일지라도 지나왔던 行 즉 지나왔던 시간은 完全한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주장하는 自由詩型은 그 의미로 anarchistic한 自由詩人의 詩型의 亂雜한 의미로서의 自由性과는 구별하고 있다. 올바른 自由詩型은 行의 발전의 必然性은 현실의 시간적인 基礎에 立脚했을때만이 그 行의 발전의 必然性을 인정한다.만일 側面에사 偶然的인 현실이 엄습해 온 경우는 이러한 偶然性도 表現上에서 排除하는것은 아니며 全體的인 規模上에서 이 偶然을 必然으로 轉化시켜 간다. 예측하기 어려운 前方이라 하는것은 이러한 偶然性의 登場을 豫定으로 넣었을때의 언어이다.
もつと社会状勢が安定的であつたら私は定型詩を或は作るかも知れない。現在のやうな社会状勢の中にゐて、意味の反覆や、リズムの周期的なものに当然帰着するところの定型詩などをつくつて人生を手なぐさみにすることは私には出来ないのである。観念の反覆性をもつて詩であるなどといふ考へ方の中には、真の詩のリズムは生れない、新しい意識が新しいリズムを生みだす。語音が思想と全く等しくなつたときだけ、正しい律格といふものを読者の前に示す。定型などといふ前もつて予約された律格の中に現実を押し込むなどといふことは、おそらく神様でもそれを成し遂げることができないだらう。
좀더 社會狀勢가 안정적이었다면 나는 定型詩를 혹은 만들지도 모른다.현재와 같은 社會狀勢 안에 있어서 의미의 反覆이나 리듬의 周期的인것에 당연 歸着하는곳의 定型詩등을 만들어서 인생을 소일거리로 하는것은 내게는 할 수가 없는것이다.觀念의 反覆性을 가지고 詩라고 하는 따위의 사고방식안에는 진실한 詩의 리듬은 태어나지 않으며 새로운 意識이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 낸다.語音이 思想과 완전히 동등하게 되었을때만이 올바른 律格이라 하는것을 讀者앞에 보여준다.定型따위라 하며 미리 예약된 律格 안에 현실을 밀어 넣는따위라 하는것은 아마도 神이라도 그것을 완성할 수가 없을것이다.
報道と生理
小熊秀熊(오쿠마 히데오) 1938年
報道와 生理
文筆に携はつてゐるものが、その文章に依つて国民の心理に影響する力は小さなものではない。たとへば朝読んだ新聞が、その人の一日中の生理的状態を支配するとさへ言はれてゐるやうなもので、新聞はいまでは、国民の肉体的な一部とさへ言へる。その報道の真実不真実は、国民生活を大きく動揺もさせれば安定もさせ、紙面から戦争の記事がなくなつたときは、ほんとうに現実に戦争が終つたかのやうに読者は思ひこんでしまふ。ジャアナリストや、文学者からは事実を知らして貰へるものだといふ読者の信頼は、ときには読者の寄りかゝりの心理ともなり、殊に戦争などといふ複雑な国家的事件を文章にする立場のものには、その寄りかかりは一種の苦痛とも化す。
従軍作家や、従軍記者の現地報告も、自ら制約を必要とされるから、事件の衝撃と緊張の最中での執筆では、その書き方に外部的な抵抗を感じないわけにはいかぬ。ありのまゝ報道するといふことが難かしいと同様に、嘘を報道することの難かしさも其処で経験させられる。
文筆에 從事하고 있는것이 그 文章에 의하여 國民의 心理에 影響하는 힘은 적은것은 아니다.예를 들면 아침에 읽은 新聞이 그 사람의 하루중의 生理的狀態를 지배한다고조차 말해지고 있는듯한 것으로 新聞은 지금으로서는 國民의 肉體的인 一部라고조차 말할수 있다.그 報道의 眞實 不眞實은 國民生活을 크게 動搖도 될뿐더러 安定도 되어 紙面에서 戰爭의 記事가 없어졌을때는 정말로 現實에 戰爭이 끝난것처럼 讀者는 생각해 버린다.저널리스트나 文學者로부터는 事實을 알리게 할 수가 있는것이라고 하는 讀者의 信賴는 때로는 讀者의 依支心理도 되며 특히 戰爭등이라고 하는 복잡한 國家的事件을 文章으로 하는 입장의 경우에는 그 依支는 일종의 苦痛으로도 바뀐다.
從軍作家나 從軍記者의 現地報告도 스스로 制約을 필요로 되기에 事件의 衝擊과 緊張이 한창 진행되는중에서의 執筆에서는 그 글을 쓰는쪽에 외부적인 抵抗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다.있는 그대로 報道한다고 하는것이 어려운것과 마찬가지로 거짓말을 報道하는것의 어려움도 그곳에서 經驗되어진다.
その何れにも拠らない位地で、良心的な報道をするといふ難かしさは、いまではジャアナリストばかりでなく、比較的主観的な文章を書く自由の残されてゐる作家に於てさへも困難な点で同じ立場に立つてゐる。
目覚ましい戦争文学はまだ現れてゐないが、新聞記事の中には、戦地報道としては『完璧』に近いものが現れてゐる。その点でも作家は新聞記者より戦争には後手で、頭の回転が一巡り遅かつた。
最近の新聞を見ると、事変の報道に漸次『コク』がでてきた。短い文章で、ピカリと利かしたもの、抽象的な表現だが、状況を強く反射さしたもの、凝結的な文章だが現実の切り口をみせてゐるものなどが散見する。読者は如何なる短い記事の文章からでも、最小限度の描写性といふものを発見しようとする。
그 어느쪽에도 의존하지 않는 위치에서 良心的인 報道를 한다고 하는 어려움은 지금으로서는 저널리스트만 아니라 비교적 主觀的인 문장을 쓰는 自由가 남겨져 있는 作家에 있어서조차도 곤란한 점으로 마찬가지 입장에 서 있다.
눈부신 戰爭文學은 아직 나타나지 않지만 新聞記事 속에는 戦地報道로서는 <完璧>에 가까운것이 나타나 있다. 그점에서도 作家는 新聞記者보다 戰爭에는 後手로 머리회전이 한바퀴 늦다.
최근의 新聞을 보면 事變의 報道에 점차로<감칠맛>이 생겼다.짧은 문장으로 번쩍 효과를 보는것, 抽象的인 표현이지만 狀況을 강하게 反射시킨것,凝結的인 문장이지만 現實의 斷面을 보이고 있는것등이 散見한다.讀者는 어떠한 짧은 記事의 문장에서도 최소한도의 描寫性이라고 하는것을 발견하려고 한다.
そこに真実が隠されてゐることを知るからである。戦地の兵士は、政治欄よりも真先に三面記事に飛びついて読むといふ。ベタ組みや一段組みの、大した記事ではないものから、却つてその記事の紙背を徹して、故郷の真実を知らうとする努力を払ふ。記者の報道の自由、不自由と関聯して、戦地の読者の、その努力が空しく哀れなものに終ることもあるだらう。
그곳에 眞實이 감추어져 있는것을 알기 때문이다.戦地의兵士는 政治欄보다도 가장 먼저 三面記事에 달려들어 읽는다고 말한다.붙여짜기나 一段짜기의 커다란 記事는 아닌것이라 오히려 그 記事의 종이뒤를 徹하여 故鄕의 眞實을 알려고 하는 노력을 기울인다.記者의 報道의 自由,不自由와 관련하여 戦地의 讀者의 그 노력이 허무하게 슬픈 것으로 끝나는일도 있을것이다.
支那軍が弱い弱いと書き過ぎるといつて、戦地の日本の兵隊が憤慨したといふ。『支那軍は決して弱くなかつた――』と前置きして、次に我軍の行為の勇敢さを報道することは、我軍の果敢さを一層はつきり眼に浮ばせることができる。事実を伝へ得るといふことは、いまでは味方を弱めはしない、戦時報道も漸くそこまで到達したのである。
山岳戦で××小隊の迫撃弾が間近に炸烈しはじめると、兵士達の体が急に軽くなる。兎のやうに膝頭がぴよんぴよん跳ねて突撃していつた――といふ新聞記事があつた。いかにも実感的である。それは兵士達の生理状態にまで記者の観察が触れた新しい報道の型である。
医者が脚気を診断するには、相手を腰かけさして、膝頭をコツンとうつ。脚気患者は脛が跳ね返らない。こゝに徴兵忌避を目的とした不心得者がゐて、脚気でもないのに気張つて脚を反射させない。医者はこ奴と思つて、その男に大声で『お母さん――』と叫ばせ、途端に膝をうつたら化の皮がはがれた。肉親的なものを呼ぶときは膝の方がお留守になつたのである。戦線で独逸兵が仏蘭西の少年兵を射殺しようとすると、少年兵は『お母さん――』と母に救ひを求めたといふ。戦場描写は漸次さうした生理的なものにまで及ばなければならないだらう。的確であれば迫真性は大きいからである。
支那軍이 약해!약해!하고 써낸다고 하여 戦地의 日本의 兵隊가 憤慨했다고 한다.<支那軍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___>하고 序論을 하고 다음에 我軍의 行爲의 용감함을 報道하는것은 我軍의 果敢함을 한층 확실히 눈에 띄울수가 있다.事實을 전달할수 있다고 하는것은 지금으로서는 我軍을 약하게는 하지 않으며 戦時報道도 점차로 거기까지 도달한것이다.
山岳戰에서 xx小隊의 迫擊彈이 가까이 炸裂하기 시작하면 兵士들의 몸이 갑자기 가볍게 된다.토끼처럼 膝頭가 뿅~ 뿅~ 튀며 돌격하고 있었다!___라고 하는 新聞記事가 있었다.제법 實感的이다.그것은 兵士들의 生理狀態에까지 記者의 관찰이 접촉한 새로운 報道의 틀이다.
醫師가 脚氣를 진단하려면 상대를 의자에 앉히고는 膝頭를 딱~하고 친다.脚氣환자는 무릎이 되튀지 않는다.여기에 徵兵忌避를 목적으로 한 마음보가 나쁜자가 있어 脚氣도 아닌데도 분발하여 다리를 反射시키지 않는다.의사는 이놈!하고 생각하고는 그 남자에게 큰소리로<어머님!___>하고 외치게 하고는 순간 무릎을 치면 정체가 탄로났다.肉親的인것을 부를때는 무릎쪽이 빈집으로 된것이다. 戰線에서 獨日兵이 佛蘭西의 少年兵을 射殺하려고 하자 少年兵은 <어머님!___>하고 어머니에게 구조를 요청하였다고 한다.戰場描寫는 점차로 그러한 生理的인 것으로까지 미치지 않으면 안될것이다.的確하면 迫眞性은 크기때문이다.
心理と訓練
心理と 訓練
小熊秀熊
戦争を文章化することが如何に難かしいことであるかは、今事変に従軍した作家が経験した筈である。或作家は戦場の兵士が、予期したより明朗であつたと感心し、爆撃から帰つた飛行士が、心に微動もなかつたやうに平然と報告してゐたと驚いてゐる。作家のこの種の観察は、作家とも思へない素人臭いものだ。一ケ月位の従軍ではこの程度の上つ面より見て帰れまい。暫く戦地にとどまつて、兵士と共に壕で泥まみれの生活をしたら果して兵士が単純で明朗であるか、空中戦で敵と生死を決して、心に微動も起きないものであるかどうかが判る筈だ。
鉄や木製の人間のやうに、軍人に観察を下す、それは作家として軽忽な態度といふべきで、生死をさへ事務的に報告する軍人精神には当然、そこに行きつくまでには、幾多の精神的な段階を経て到達した一個の信念があるに違ひない。
死が少しも恐怖すべきものでなく、むしろ親しい友人のやうに感じられるまでの訓練、それが自己訓練であるか、或は外部からの訓練であるか、何れにせよ、作家は軍人の日常生活に理解を透さなければ、軍人心理の細部を描くことは不可能である。
戰爭을 文章化하는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지금 事變에 從軍한 作家가 經驗했어야 한다.惑 作家는 戰場의 兵士가 豫期한대로 明朗이었다고 感歎하고,爆擊에서 돌아온 飛行士가 마음에 微動도 없었던것처럼 泰然하다고 報告하고 있었다고 놀라고 있다.作家의 이러한 種의 觀察은 作家라고도 생각할 수가 없는 풋내기티가 나는 자이다! 一個月 정도의 從軍으로는 이정도의 겉면에서 보고 돌아올수가 없다.잠시 戰地에 머물러 兵士와 함께 塹壕에서 흙투성이의 生活을 했다면 과연 兵士가 單純하고 明朗한지,空中戰에서 敵과 生死를 決하여 마음에 微動도 일으키지 않은것인지 어떤지 알것이다.
鐵이나 木製의 人間처럼 軍人에 觀察을 내리는 그것은 作家로서 輕忽한 태도라고 말해야만 하며 生死를조차 事務的으로 報告하는 軍人精神에는 당연,거기에 다다르기까지에는 幾多의 精神的인 段階를 거쳐 도달한 一個의 信念이 있음이 틀림 없다.
죽음이 조금도 恐怖해야만 하는것이 아니고 오히려 친한 친구처럼 느껴질때까지의 訓勵,그것이 自己訓練인지 혹은 외부에서의 訓練인지 어쨋거나 作家는 軍人의 日常生活에 理解를 透하지 않으면 軍人心理의 細部를 그리는것은 不可能이다.
新兵さんが銃剣術の練習を始める。前方五十米ほどに、藁を束ねた棒が列べて立ててある。上官が『突込め――』と命令する。新兵達は銃剣を構へて、それに向つて『わあ』と叫びながら駈てゆく。そこで銃剣で藁束を突く。しかし新兵達は何のために剣で藁を突くのかさつぱり判らない。藁束を敵兵と見たてて、突く練習をしてゐることだけは確である。しかし肝心の『腹が立たない』のである。従つて剣に身が入らず、アンコでもこねる調子である。そこで上官は講評する。
『いかん、いかん、そんなやり方では――。こゝまで駈けて来る。こゝへきたら、何でもいいから叫ぶんぢや。藁の棒だと思ふな。敵の胴体だと思つとらんけりやいかん。わかつたか。もう一度始めつ――』
そこで新兵達は、再び藁束まで吶喊して、藁束を銃剣で突くとき、上官の命令のやうに今度は各自罵る言葉を考へ出し、或る者は『こん畜生奴』といひ、あるものは『いゝ、参つたか』『さあ、どうだ』『死(くた)ばり損ない奴』『一本喰らへ』なかには女性的にヒステリカルに『うむ、憎らしい――』などと叫んで散々藁を突きまくるのである。不思議なことには、これを繰り返すうちに疲労で眼がボッと霞み、藁束にも腹が立ち、結構支那兵の胴にも見えてくる。
新兵이 銃劍術의 練習을 시작한다.前方 50미터 정도에 짚을 묶은 막대기가 나란히 서 있다.上官이 <찔러!>하고 命令한다.新兵들은 銃劍을 갖추고 그곳에 向하여<와~아!>하고 외치면서 달려간다.그리고 銃劍으로 짚다발을 찌른다.그러나 新兵들은 뭣 때문에 劍으로 짚을 찌르는지 확실하게 모른다.짚다발을 敵으로 간주하고 찌르는 연습을 하고 있는것만은 확실하다.그러나 중요한<화가 나지 않는다>는것이다.따라서 劍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앙꼬라도 반죽하는 박자이다.그래서 上官은 講評한다.
<아냐!아냐!그런 식으로는!____.여기까지 달려 온다!여기에 오면 아무거나 좋으니 외치는거야!지푸라기 막대기라고 생각하지 마!敵의 몸뚱아리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돼!알았나!다시 한번 시작해!___>
그래서 新兵들은 다시 짚다발까지 吶喊하고 짚다발을 銃劍으로 찌를때 上官의 命令처럼 이번에는 각자 욕지거리를 생각해 내고,어떤자는<이 개새끼!>하고 말하며 어떤자는<좋아!왔냐?> <자!어때!><뒈지지 않는 놈!> <한방 먹어라!> 개중에는 女性的으로 히스테리칼하게 <음!얄미워!___>따위로 외치며 散散히 짚을 찔러대는것이다.이상한것으로는 이것을 반복하는 동안에 疲勞로 눈이 멍하니 흐려지고 짚다발에도 화가 나서 제법 支那兵의 몸뚱아리로도 보여진다.
訓練とは、同一の事柄を何べんも反覆することによつて、その目的を達することができる。この繰り返しの中で、なるべく知性はとりのぞかねばならない。藁束と生きた人間との区別を失ふといふところまで、感性的になる必要がある。フランスの或る将校は彼が軍人に似合はしからぬ懐疑派で、毎朝の参謀本部への通勤が、どういふものか気が進まない。
妻君は気丈な女で、亭主に軍服を無理に着せて、亭主を玄関に立たして、背後から『前へ――』と号令をかける。すると亭主はトコトコと前進する。家の角を曲つて姿が見えなくならうとする時、妻君はつづいて『駈け足』と号令する。毎朝妻君の号令で無事に軍務に服し、家庭も円満になつたといふことである。
一つの環境の中で、厳然と保たれてゐる命令者と、被命令者の立場も、別な環境、つまり亭主と女房といふ風になつてくれば自ら違つてくる。彼は部下に命令されることは決してないが、女房には服従する。それは笑ひごとではない。それが人生の姿である。人間のタイプの中で、軍人程誠実なものはない。この人々は懐疑や逡巡を軽蔑する。この人々は裏切ることがない。上官に、『死んでくれ――』と命令されゝば、兵卒は真個(ほんと)うに死ぬ。また同時に、裏切ることがないといふこと程、人生に恐ろしいことはない。
訓練이란,同一한 일을 몇 번이나 反覆함에 의해서 그 目的을 達할 수가 있다.이 반복의 안에서 될수 있는한 知性은 제껴놓지 않으면 안된다.짚다발과 산 人間과의 區別을 잃는다고 하는점까지 感性的이 될 필요가 있다.France의 어느 將校는 그가 軍人에게 어울리지 않는 懷疑派로 매일 아침의 參謀本部에의 通勤이 어떤것인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부인은 다부진 여자로 남편에게 軍服을 무리하게 입히고 남편을 현관에 세우고는 背後에서 <앞으로!___>하고 號令을 한다.하면 남편은 종종걸음으로 前進한다.집 모퉁이를 돌아서 모습이 보이지 않으려 할때 부인은 계속해서<뛰엇!>하고 號令한다. 매일아침 부인의 號令으로 무사하게 軍務에 服하고 家庭도 圓滿하게 되었다고 하는것이다.
하나의 環境中에서 奄然하게 유지되고 있는 命令者와 被命令者의 입장도 다른 環境 즉 남편과 부인이라고 하는식으로 되어주면 저절로 다르게 된다.그는 부하에게 명령받는 일은 결코 없지만 부인에게는 복종한다.그것은 웃음거리는 아니다.그것이 人生의 모습이다.人間의 type중에서 軍人만큼 誠實한 것은 없다. 이 사람들은 懷疑나 逡巡을 輕蔑한다. 이 사람들은 배신하는 일이 없다.上官에게<죽어주게!__>하고 명령받으면 兵卒은 정말로 죽는다, 또 동시에 배신하는 일이 없는만큼 人生에 무서운것은 없다.
强制避暑は如何!は 如何!
小熊秀熊
制避暑は如何!
強制避暑は如自然は如何に人間の感情を豊かにするものであるかといふことを北海道旅行をして痛感した、東京に住んで人間関係のわづらはしさに苦しむのも、また楽しみだが、そのわづらはしさも、連続的だと痲痺し、混乱して、救ひ難いところに立ち至る、さうした場合、「人間とは何か―」といふ人間なるものの明確な位置を決めてかゝりたいといふ慾望もまた起きてくる、北海道の広漠たる原野に立つたときには、どんなに思索的でない人間でも、少しは周囲の自然と自分との関係を対照的に考へないわけにはいかぬ、つまり誰でも四流の哲学者位にはなれるわけだ。
自然은 얼마나 人間의 感情을 풍부하게 하는것일까 하는것을 北海道 旅行을 하며 痛感했으며,東京에 살면서 人間關係를 번거러움에 괴로워 하는것도 또 재미지만 그 괴로움도 連續的이라고 痲痺하고 混亂하여 救濟하기 어려운곳에 이르러서 그러한 경우,<人間이란 뭔가?>하는 人間 됨됨이의 明確한 位置를 결정짖고 싶다고 하는 慾望도 또 일어나며,北海道의 廣漠한 들판에 섰을때에는 아무리 思索的이지 않은 人間이라도 조금은 周圍의 自然과 자신과의 關係를 對照的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며 즉 누구라도 四流의 哲學者 정도로는 될수 있는것이다.
丁度僕は北海道の田舎の古本屋でトルストイの小説「コサック」を買つて読んだ、これは広津氏の古い頃の訳で読み易かつた、心理主義的な雰囲気に沈んでゐる現代青年にとつて、この小説は再読すべき健康の書だらう、作中人物オリヱェ[#「ェ」は底本では「ヱ」の小文字]ニンは作者トルストイそのものだが、彼はコウカサスの絶望的な静かな自然の中に立つたとき始めて人間を自覚して興奮しながら山を下る場面がある。
바로 나는 北海道 시골의 오랜 책방에서 톨스토이의 小說 <코삭크>를 사서 읽었으며 이것은 広津氏의 옛시절의 탓으로 읽기 쉬웠던 心理主義的인 雰圍氣에 가라앉아 있는 現代靑年에 있어서 이 小說은 再讀해야만 할 健康의 書일것이며,作中人物 オリヱェニン은 作者 톨스토이 그것이지만,그는 코카사스의 絶望的인 조용한 自然 속에 섰을때 비로서 人間을 自覺하고 興奮하면서 山을 내려오는 場面이 있다.
作者は人間を自覚したとき始めて人間の行為を強烈に自覚し、実行に移つたのである、嫌になるほど人間が多くて、眼を見合はせ、体臭を嗅ぎ合ふといふ都会生活者は、折々は自然の中で人間の位置を設定してから仕事にかゝるといふことも必要だらう。
作者는 人間을 自覺했을때 비로서 人間의 行爲를 强烈하게 自覺하고,實行에 옮기는것이며 嫌이 될 정도로 人間이 많아서 눈을 맞추치고 體臭를 서로 맡는다고 하는 都會生活者는 가끔은 自然 속에서 人間의 位置를 設定하고 나서 일에 착수한다고 하는것도 必要할것이다.
国家の政策にも、人間と自然との関係に無視出来ないものがある、簡単な例だが、東京には実に痰性な人間が多いとみえて、路に痰をする、政府は「痰を路にしないやうに――」とポスターで宣伝してゐる、ところで東京の埃と煤煙の空気を吸へといふ方が無理なので、これは痰にし吐き出すより仕方がない、北海道の空気は清潔なので僕は完全に空気を吸つた、したがつてあつちでは遂に路に痰をしなかつた、強制労働もいいが、国民を自然に接触させるために、強制避暑などといふのはやつてみたらどうだらう。
國家의 政策에도 人間과 自然과의 關係에 無視할수 없는것이 있으며 簡單한 例이지만 東京에는 실로 痰性인 人間이 많다고 보여서 路에 痰을 하며,政府는<痰을 路에 하지 않도록___!>하며 poster로 宣傳하고 있으며 그런데 東京의 먼지와 煤煙의 空氣를 빤다고 하는쪽이 無理인것이라,이것은 痰으로 하여 토해내는 것으로 방법이 없으며 北海道의 空気는 淸潔하기에 나는 完全히 空氣를 마시며 따라서 저쪽에서는 결국 痰을 하지 않았으며 强制勞動도 좋지만 國民을 自然에 接觸시키기 위하여 强制 避暑따위라고 하는것은 해보면 어떨까!
強者の焦慮に就て
――諷刺文学のために――
諷刺作家が、自己の諷刺的手法の機能がどんなに有効なものであるかといふことに、自信をもつことができたら、諷刺することに少しも懐疑的である筈がない、然るに世間には往々にして諷刺作家をもつて自称してゐるものであつても、事実は諷刺作家でも何でもないものが少くない。この種の者は、程度の低い『嘲笑主義者』にすぎないのである、諷刺作家と、嘲笑主義者とは、はつきりと区分する必要がある。
これらの嘲笑主義者は、多く諷刺作家を敵に廻してゐるのである。そして諷刺の機能を軽蔑しながらも、その諷刺にかはるものとして、有合せの『嘲笑』を使つてみようと企てる。そしてそれがうまく成功した場合には、自分は諷刺作家であると名乗りをあげて登場しようとする。失敗した場合には、正統な諷刺家を嘲笑し、皮肉つただけで終るのである。
私はこれまで諷刺詩を書いてきた関係から、この種の嘲笑主義者に、無数に出逢つてゐる。彼等は斯ういふ『彼は他人の諷刺をしてゐるが、諷刺してゐる彼自身の姿こそ、諷刺されてゐるやうで滑稽である――』といつた批評をするのである。
しかしこれだけの言葉の中から、どれだけの内容を引きだすことができるだらうか、しかし我国の所謂一流の理論家、批評家と自他共にゆるしてゐる人々が、殆んど言ひ合したやうに、諷刺文学に対しての意見の持ち合せが、これだけよりないのである。どのやうなものも口に余さない日本の文芸批評家も、諷刺文学論だけは、口に余した、これだけは挟む箸の持ち合せがなかつた。
一方文学の時流に追従することに熱心な日本の作家達も、諷刺文学だけは襟に巻くことをしなかつた。それは何故にであらう。文学を遊びごとにする人々にとつては勿論諷刺的な文学形式を使ふなどといふことは、少しく峻厳にすぎるからである。ユーモア文学は掃き捨てるほど盛んに生産されてゐる現状にも、諷刺文学の形式上の本質を追求しようなどといふ心掛けをもつてゐるものは全くない、それといふのも、この文学形式は、諷刺する方も、諷刺される側も、各自がもつてゐる『教養と財産』とにとつて危険極りない代物であるから、利巧と名のつく者が、手に触れない種類のものである。ユーモア文学程度で止めてをいて、諷刺文学にまで入らなければ、自己保全は達せられる。小説形式の在来の型を追つてゐる限りでは無事なのである。日本の小説家達も、諷刺的形式に小説を運びこむには、勇気がいることを薄々知つてゐる。社会的テーマに入らなければならないし、従つて外部的な抵抗にも触れなければ優れた仕事が出来ないことも感じてゐる。諷刺文学の仕事の困難な、錯雑さに堪へる力をもつてゐない大部分の小説家が、諷刺的方法の採用を避けてゐるといふことも理由のないことではない。
殊に諷刺作家が、かへつて道化者のやうに批評家の眼に映ずるとすれば、さうした諷刺的事業を始めるといふことは、現在のところ、一つの冒険であり、悲劇である。それを押し切つて諷刺文学にすすむといふことは容易なことではない。しかし私は考へるのである。諷刺作家自身が見た眼には、滑稽に見えるやうなことであつても、決して悲しむ勿れ――といひたい。シェ[#「ェ」は底本では「ヱ」の小文字]クスピアの『リア王』の中で、リア王の追従者である『唖呆』と呼ばれる諷刺家が果す役割のことを考へてみたらいい、唖呆は最も遠慮会釈もない態度で、辛辣な言葉を、リア王に投げかける、リア王はどれほどこの唖呆に皮肉られても怒るといふことをしない、彼は実に滑稽な男であつて、それこそ日本の批評家の言葉『諷刺してゐる彼自身の姿こそ諷刺されてゐるやうで滑稽である――』といつた存在である。リア王がこの道化者を必要としたことは、リア王が自己の批判者を、この唖呆といふ従者であり、諷刺家である男に求めてゐたからであつて、追従者であり且つ批判者であるといふ特殊な形の道化者を傍に置くことは、リア王にとつては必要なことであつた、王は最高の位置にあるために、リア王に対して、積極的に意見を述べるといふ役割に立つものはゐない、この道化者『唖呆』だけが、王との日常的な悪ふざけの中で、精々王のやり方に対して批判的な言葉を投げかける。王と唖呆との間には、言葉の上の交際では、階級的区別を全く取りのぞかれてゐる。しかし唖呆が第一流の諷刺家に成り切れない理由、つまり第三流的通俗諷刺家である理由が起つてくる、そのことはリア王の批判も、あまりに真実にすぎるという場合には、お払ひ箱になるといふ場合が起きてくるからである。唖呆がリア王の従者を完ふするには、王を適当に諷刺したり、言ひ過ぎた場合には、お追従笑ひ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こではどのやうな場合でも、主従関係を超越することは不可能な立場にをかれる。
真の意味の諷刺家、或は諷刺作家になるには、一切の主従関係のないところの立場にたたなければならない。文壇の封建的要素である、文壇的主従関係の束縛の中では何事も為すことが不可能である。孤立的であることを恐れてはならないと同時に、対立的になることも、また恐れてはをれない。諷刺作家は、面白がらせるといふ、創作方法に依つて、作家であると同時に、批評的な目的をその作品に附与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は勿論のことである。作家と批評家の両方の機能を一人で果すといふ意味の優れた方法をもたなければならないし、またそこに仕事の面白さも、隠れてゐるのである。
或る匿名批評家が、曾つて私をかう批評したことがある。『彼の諷刺に対しては、誰も問題にしてゐないのに、一人で喧嘩を売つてゐる――』そして次に斯ういふ意味のことをつけ加へる、『一人前にならない小狐が、文壇といふ甘味の豊富な葡萄のなつた棚の下で、指を咬へてゐる格好である――』といふのである。文壇がそんなに豊富な甘味のあるところとは私は思へない、この匿名批評家の口裏には、この筆者が鼻持のならない文壇臭の持主であることがわかる。腹の底から文壇の臭さに染つた批評家の言葉であることが明瞭である。もしこの匿名子のいふやうに、文壇といふ場所が、葡萄のやうな甘さが真個(ほんと)うで、味はつたことのないものには到底理解できないやうな、醍醐味に富んだものだとすれば、少しく理屈の合はないものがある。
それはこれまで私はよく熟した葡萄といふものを見たこともあるし、知つてゐる。この種のよく熟した葡萄といふものは、枝もたはむほどの房であつて、地面に届くほどに垂れ下つたものもある、もし人間共が、この葡萄の枝に棚といふものを作らなければ、見事に地面につくほどに重く熟したものだ。もし匿名子がいふやうに、小狐の口までも届かない高いところにあるやうな葡萄であつたら、もし口が仮りに届いて喰べたところで、酸つぱいか、或は乾あがつたやうな粒にちがひない――と私はこの匿名批評を読んだとき苦笑したのである。
私は読者にむかつて、大体に於いて私の観察が当つてゐることを自信をもつて言ふことができる。文壇などといふ葡萄棚は、棚の高さにあつて、酸つぱい未熟な粒をならべてゐる位がオチである。しかもここの葡萄園は葡萄を実らすことよりも、枝を支へる方が忙がしいところである、真に美味な葡萄はそんな雑居的な棚になどはゐない。別なところにあつて民衆の口にとどくところにまで低く垂れ下つてゐるものである。問題にもしてゐないのに喧嘩を売る――という匿名子の批評に就いては、このことは諷刺作家が、諷刺敵の発見の方法に関係したことであるから、研究の余地がある。諷刺作家の諷刺敵を発見するといふ方面は、全く独特な方法にある。問題にされないことを、悲しんでゐる暇があつたら、その暇に諷刺作家は連続的なかたちで作品をつくつてゐれば良いのである。詩人レルモントフは、小説『現代の英雄』の中でかういつてゐる『自分は友人によりも敵に好意を示すだらう。何故なら、憎悪は只敵の寛量に順応してのみ強められるものであるから――』といつてゐる。このレルモントフの精神こそ、諷刺家の攻撃精神といふことができる、敵はしばしば寛量を示すものである。その途端にレルモントフのやうに、その寛量に甘へてはゐないで、一歩二歩と足を踏みこんで『順応して強められる』といふ憎悪をもつこと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多くの場合、相手が寛量を示すと、それに甘へるか、停滞して憎悪することを中止するか『順応して弱められる』かである。諷刺作家にとつて、自分の諷刺に対して、相手がこれを問題にしてくれないといふ態度は、悲しむどころか、むしろ敵の寛量として好意を謝していい、そしてそのために憎悪は却つて強められなければならないし、相手の黙殺を好機として、その相手に対して諷刺することが連続的でなければならない。
レルモントフは文学上の攻撃に関して『思想感情の交換は、吾々の間には不要です、残るのは一つの方法だけです、新しい出来事を語るだけです――』と言つてゐる。レルモントフの立場の明確さ、理屈や感情の取り交はしを否定してゐる。ここでいふ新しい出来事とは、作家、批評家の新しい創造的な事業といふ意味であるから、日本の文壇にとつては一層困難な事業となるだらう。
詩人レルモントフの描く作品の中には、非常に性格の強い人物が現はれてくる。このペチョリン的青年は、私にとつて一つの魅力である、作者レルモントフの積極性は『卑賤なものに対する強者の焦慮の声』と言はれてゐるが、ここでいふ卑賤なるものといふ言葉は、貴族が平民に向つていふやうな意味のそれではなく、その言葉は精神上の『卑屈なもの』といふ意味である。ここでいふ『強者』とは正統なるもの、正義的なるものの保持者、これが積極的な遂行者といふ意味である。強烈な正義観に燃えたレルモントフは、卑屈なものの存在することに我慢ができない、焦らだちをもつてゐた、そして作品の上で、これらの諷刺敵に向つて闘ひをいどんだのである。詩人プーシキンにもさうした『強者としての焦慮』を作品的にも、作家的動きにも発見できる。
レルモントフの場合の悪魔主義は、けつして当世流の絶望的厭世主義とはちがふ、それは人生のすべての卑賤なるものに対する好戦的な反抗の声であつた。作品に現はれた強者としての焦慮は、時には哀愁となり、或は喜悦となり、好戦的であると共に、時には底知れぬ敗北を歌ひだすといふ、立派な闘ふ人としての名優ぶりを示す、このタイプは、レルモントフにも、ヱセーニンにも、マヤコフスキイにも見出すことができるが、この一聯の好戦的な詩人達は、プーシキンとレルモントフとは決闘に依る死を、ヱセーニンとマヤコフスキイは自殺といふ悲劇的な運命をもつて、言ひ合したやうに結末をつけてゐるのである。
作品の上では強者の焦慮を歌ひ、諷刺的な好戦的な詩人も、運命的には不自然な死を選むこともあるといふことをこの四人の優れた諷刺詩人が立証したやうなものである。事実これらの詩人に例をとるまでもなく、むかしから優れた諷刺詩人は、決して反抗のための反抗者ではない。棍棒のやうに太い無神経な方法では、諷刺はできない、これらの優れた諷刺家は強い一面には、女性的であるとさへ思はれるほどの繊弱な感情のもち主である場合も少くない。ハイネや、シルレルを例にひくまでもなく、これらの詩人は何れも宿命論との良き闘ひ手ではあつたが、本人達は人間の運命といふものに対して、従順な人々が大部分であることも興味がある。
レルモントフはその詩人的激情性から、度々決闘をしたが、彼は何時の決闘のときでも相手をねらふことをしないで、空を撃つたと言はれてゐる。そして作品の上の決闘の場ではどうであるか、撃ちそこなつて、足を傷つけただけでも、背後の谷底に墜ちこむやうに、自分も相手も崖際に立つて勝負を決し、決定的な生死を賭ける方法を選んでゐる。そして作品の上では、何時も敵を惨忍に谷の中に射落してゐる、現実のレルモントフの決闘は、相手に対して殺意を持たずに空を射ち、作品に書く決闘では、完全に敵を斃してゐるといふ矛盾は作家の心理の復[#「復」に「ママ」の注記]雑さを語るものであらう。
『寛量』と名づけられるものを、少しもゆるさないといふ態度は、諷刺作家といふ意味だけに止まらず、作家の態度として立派なものだと思はれる、論争といふものを『友情ある闘争』と呼んだ政治家があるが、この人は『友情ある闘争のための地盤が未だ存在する間だけ、吾々は論争する――』と言つてゐる、更に言葉をつづけ『そして若しもこの地盤が失くなつたら、即ち相手が公然と観念論者たることを自白したことだ――』と附け加へてゐる。自分が論争を求めまた論争をする余地を認めてゐるのに拘はらず、相手がそれを避けてしまふといふ場合がある。その論争をする地盤がなくなつたときは、相手が公然と観念論者となつたものだといふ、我々の生活上でも、この種の場合が甚だ多い、私的な或は公的な場合にも、事なかれ主義を選む、観念主義者が少くない、殊に学問や、芸術の進展の過程には、論争を避けるといふことは不可能であるのに、議論を非友情的なものとして、論旨の発展の方法の協同性などといふものを認めない人々も少くない。
諷刺作家は、相手がそれに答へる、答へないに拘はらず、諷刺する地盤を自分で作りあげることのできる間は一人前である。敵が黙殺することは、敵の寛量として、これに順応して、より諷刺は強められなければならない。プーシキンやレルモントフの作家生活は、さうした不断な諷刺的追求の一生であつた、問題にする、問題にして貰ふといふ考へ方に執着してゐることは文壇至上主義者の態度である。
この種の批評家や匿名子は、言はば他人の論争の分け前を貰つて生活してゐるものである。かかる卑屈な乞食根性を排す、諷刺家は誰からも分前をもらつてゐないといふ意味で気軽な猟が出来るのである。もし諷刺作家の諷刺を少しも問題にせず、何等答へないといふことが、仮に永久的であつたとすれば、諷刺家にとつては、こんな有り難い都合の良いことはない、さういふことには関係なく、諷刺家はせつせとただ誠実な態度で、諷刺の手を止めなければ良いのである。諷刺とは何等特別な道徳から出発した一つの方法ではない。作家が理解するところの正統な世界を、現出するのに、都合の良い方法を、単に『諷刺』といふ方法に求めただけの話である。諷刺は悪口ではない、しかし世間的には悪口と解されてゐる。他人の悪口を言つて、それで木戸御免であれば、良いお株であり、いい顔だと思ふ、もし論争が起きたとすれば一層諷刺家は恵まれたことになる。さうした場合は諷刺的才能を極度に発揮する良い機縁を得たものとして、その論争を粗末に取扱はないやうにする、そしてそこで諷刺の腕を磨く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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