政治と作家 小熊秀雄 <1939年>
我国の政府はちかごろ文化政策に、積極的に乗り出して、文壇でも政治家と作家との会談の機会が多くなつてきた、曰く農民文学懇話会、都会文学懇話会、そして最近では拓相の肝煎りで大陸文学懇話会もできる、これらの政治家との会談組の作家の中には、生れて始めて政治家なるものと逢つたといふ経験を味つたものもあるだらう、政治家と作家と対談する、それだけでも勝手の違ふものがあらう、政治家にむかつて、ものの言ひ方から習は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ふ政治家の前には、作家の幼稚園児的な態度が、眼に見えるやうである。
我國의 정부는 요즈음 문화정책에 적극적으로 앞장을 서서 문단에서도 정치가와 작가와의 회담 기회가 많아졌으며,이른바 농민문학 간담회,도회문학 간담회 그리고 최근에는 拓相의 배려로 대륙문학 간담회도 생겨 이들 정치가와의 회담에 참여한 작가중에는 생전 처음으로 정치가라는 사람들과 만났다고 하는 경험을 맛 본것도 있을것이며 정치가와 작가가 대담하는 그것 만으로도 입장이 다른 점이 있을것이고 정치가에 대하여 본질의 표현방법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하는 정치가의 앞에서는 작가의 유치원 아이와 같은 태도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政治家対作家の精神的交通を自然にするには、作家は何も第一流の作家でなくても構はない、たとへば大政治家と陣笠との政治的関係が、思ひのほか密接不離である、そのやうにも、第一流の政治家に対する第三流の作家であつて良いので、たゞ対手の政治家に対しては、その腹心たることを誓ふことを忘れてはならない、つまり文学イデオロギーを必要としない、陣笠イデオロギーをもつて接すべしである、その位にしても、作家はなか/\政治家の所謂「真意」なるものが、どこにあるかわかるものではない。世にいちばん腹黒い人種は政治家だとされてゐる、このなか/\底を割らない種族と作家なるものが交際を始めるには唇の動きを知るより、腹の動きを知るといふこと、腹話術でも練習してかゝる必要があらう。
정치가對작가의 정신적교통을 자연스럽게 하는것에는 작가는 꼭 일류의 작가가 아니라도 관계가 없으며 가령 대정치가와 졸병과의 정치적 관계가 생각 밖에 대단히 밀접하며 그런식으로 일류의 정치가에 대한 삼류의 작가라도 좋으며 단 상대의 정치가에 대해서는 그 심중의 뜻을 맹서함을 잊어서는 안되며 즉 문학 Ideology를 필요로 하지 않고 졸병 Ideology를 가지고서 접하여야 할것이고 그 정도에 있어서도 작가는 좀처럼 정치가의 소위<眞意>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것은 아니다.세상에서 가장 속이 시커먼 인종은 정치가라고 하며 이 좀처럼 속을 드러내지 않는 종족과 작가들이 교제를 시작함에는 입술의 움직임을 알기 보다 배의 움직임을 안다고 하는것 복화술이라도 연습해 둘 필요가 있을것이리라.
作家は少しばかり政治といふものを甘く見すぎてゐるやうである。政治の機構の複雑なことを知つてゐるものであれば、政治家の口から「真意」なるものを窺ひ知らうなどとは考へまい、政治家は彼の立候補の政見発表演説とか、口約とか、会談席上のティブルスピーチなど位からはわからない、政治家の口は、たゞ政策をどんどんと嚥み込むだけであつて、作家は政治家の口から真意を知るより、彼の肛門を覗いた方が早からう、政治家の真意とは、政治家としての行為の結論によつてのみ知る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
작가는 조금은 정치라고 하는것을 지나치게 가볍게 보고 있는듯하다.정치기구의 복잡함을 알고 있다고 하면 정치가의 입에서<眞意>다운 것을 간파할수 있다고는 생각할수 없으며 정치가는 그의 입후보의 정견발표 연설이나 공약이나 회담석상의 탁상연설 정도로는 알수가 없으며 정치가의 입은 그저 정책을 숙숙 씹어내는 정도로 작가는 정치가의 입에서 진의를 알기 보다는 그의 항문을 들여다 보는 쪽이 빠를것이며 정치가의 진의라는 것은 정치가로서의 행위의 결론에 의해서만이 알수가 있는 것이다.
それを文学者が、もし政治家の口が真意の汲取口だなど考へちがひをして、その口に柄杓を差し込んだりなどしたら、差しこんだ柄杓がぬけなくなる破目に陥ることは必定である、文学にも臭味があるやうに、政治にも相当な臭味がある、両者が半信半疑の状態で、遠くはなれて柄の長さで互に接触してゐるやうでは、ラチがあくまい、最近の政党や文学者が、そのまだるつこさを投げ捨てゝ――手を握つた、どつちかがどつちかの臭味をより強く握つたことだけは確である。
그것을 문학자가 만일 정치가의 입이 眞意를 퍼내는 입이라고 잘못 생각하여 그 입에 국자를 쑤셔 넣는다고 한다면 쑤셔 넣은 국자가 빠져 버릴 지경에 이름은 당연하며 문학에도 악취가 있듯이 정치에도 상당한 악취가 있어 양자가 반신반의의 상태로 멀리 떨어져서 국자의 길이로 서로 접촉하고 있어서는 의견일치가 되지 않으며 최근의 정당이나 문학자가 아직은 실과도 같은 거친 숨을 내던지고 손을 잡고 어느쪽이 어느쪽의 악취를 보다 강하게 쥐었는가 하는것만은 확실하다.
良質の政党や、政治家は行為の公平性をもつて柔らかに国民に接することができる、しかし政治家は悪質なそれであつても、政治的功利性から、田舎に帰れば、一票をもつてゐると思へば、役場の老小使さんにも、実に丁寧にお低頭をすることを知つてゐる、しかもこの馬鹿丁寧さで、選挙民の栄養を吸ふことの巧みさは、スープを吸ふごとしである、その吸ひ方は皿の中の汁をスプーンをもつて、手前に運んで、吸へるだけ吸ひ、だんだん汁を吸つて汁が残り少なくなり吸ひ難くなると、こんどは皿のフチを指でもちあげ、スプーンを逆に向う側に押して汁をすくふ、文学といふ汁に少しは栄養があるとすれば政治家はそれをスープを吸ふやうに、調子の良い間は手前に、調子が悪くなれば最後には、向う側にすくふ位が関の山であらう。
양질의 정당이나 정치가는 행위의 공평성을 가지고 유연하게 국민에게 접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정치가는 악직절이기는 하여도 정치적 공리성에서 시골로 돌아가면 한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관청의 나이든 말단직원에게도 실로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야 함을 알고 있으며 게다가 이러한 지나칠 정도의 예절로서 선거민의 영양분을 빠는 솜씨는 스프를 빠는것과 같아서 그 빠는 방법은 접시 안의 국물을 숟가락을 가지고서 손앞으로 날라다가 빨 만큼 빨아서 점점 국물을 빨아서 국물이 남겨지지 않게 되어 빨기가 어려워지면 이번은 접시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들어올려 숟가락을 거꾸로 하여 눌러서는 국물을 퍼내고 문학이라고 하는 국물에 조금은 영양분이 있다 하면 정치가는 그것을 스프를 빨듯이 상황이 좋은 동안은 손앞에 상황이 나빠지면 마지막으로는 반대쪽으로 퍼내는 정도가 한계일것이다.
いまこそ作家は、政治家に立ちむかつては、いかにも作家の「自由の精神の脆さ」を自覚すべき時ではあるまいか、しかもその脆さ加減が、ちかごろ位、最もはつきりとした姿で証明されたことは珍しい、それも戦争のお蔭である。作家の心の自由といふ、ものゝ考へ方が脆弱なばかりではない、つまり観念や意志のもろさだけではない、作家の肉休そのものの、政治のお声がかりに応じて、肉体への外部的ショックで、手もなく今日は東に、明日は北に、政策といふものにもち運ばれるのである。
지금이야말로 작가는 정치가와 마주하고서는 어떻게 해서던지 작가의<자유의 정신의 나약함>을 자각해야 할때는 아닐까?게다가 그 나약함의 정도가 요즈음에 가장 분명한 모습으로 증명되는 것은 흔치가 않으니 그것도 전쟁 덕분이다.작가의 마음의 자유라고 하는 사물에의 사고방식이 나약함만은 아니고 즉 관념이나 의지의 취약성만은 아니며 작가의 육체 그것이며 정치의 부름에 응하여 육체에의 외부적 쇽크로 손도 없이 오늘은 동으로 내일은 북으로 정책이라고 하는 것으로 끌려 가는 것이다.
旅行鞄の中に、痔の坐薬をつめこんで、寒い大陸に従軍する作家の、その悲愴さは見あげたものである。しかし、これをもつて直ちに兵士なみの勇気には繰入れることはできない、作家の勇気といふものと、兵士の勇気といふものとは、少しばかりその勇気の性質がちがつてゐる筈である。火野葦平は、この作家の勇気と、兵士の勇気との喰ひ違ひとを、最も良く現した存在であり、彼の作品は漸次さうした矛盾の傾向を、その書くものに現してきてゐるのである。
여행가방 속에 치질 좌약을 쑤셔 넣고는 차가운 대륙에 종군하는 작가의 그러한 비장함은 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바로 병사 수준의 용기로는 집어 넣을수는 없으며 작가의 용기라고 하는 것과 병사의 용기라고 하는것과는 조금은 그 용기의 성질이 달라야 할것이다.火野葦平은 그 작가의 용기와 병사의 용기와의 전혀 다름을 가장 잘 나타낸 존재이며 그의 작품은 점차적으로 그러한 모순의 경향을 그의 작품에 표현해 왔던 것이다.
軍当局は、その最初に於て、火野葦平を作家にあらず一兵士なり――と説明した。それによれば読者は彼の文章から、兵士の勇気を感じなければならない。しかし彼の書くものが、果して兵士の勇気を証明する文章であるかどうか、我々は疑はざるを得ない。
군당국은 그 최초에 있어서 火野葦平를 작가가 아닌 병사로서 설명 하였다.그것에 의하면 독자는 그의 문장에서 병사의 용기를 느끼지 않으면 안된다.그러나 그가 쓴 것이 과연 병사의 용기를 증명하는 문장인지 아닌지 우리들은 의심하지 않을수가 없다.
それでは彼の書くものから、作家の勇気を感得することができるか、これまた作家の勇気とは甚だ遠いものがある。その何れでもないといふ意味で、火野をその両方だとは言へないのである。
그렇다면 그가 쓴것에서 작가의 용기를 느낄수가 있는가? 이 또한 작가의 용기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점이 있다.그 어느것도 아니라고 하는 의미로 火野를 그 양쪽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는것이다.
政治の文化面に対する働きかけは、いまでは完全に、政治は観念の仲立人としてその役割を果たしつゝある、火野の文章の出来、不出来に拘らず、兵士対作家、或は兵士対国民、或は政治対文学、といつた二つの対立的な観念体の、仲介人的役割を果してゐるといふべきであらう、兵士の勇気とは、敵に対する不服従、抵抗、などをもつて表現される、優秀な兵士がさうであるやうに、作家精神に於いても、勇気と呼ばれるものは、兵士の勇気と、同じ形で現れる、試みに処女の体のどこかに、ちよつとでも指を触れて見給ヘ――彼女は処女特有の潔癖から、飛びあがつて驚くだらう、現在の作家はこれに反して政治といふものに体中揉まれても、そのことに不感症になつてゐる、そればかりではない、蓮つ葉女のやうに、高い声で笑ひながら、これ以上ないといつた媚態を示す、そこには作家的勇気は勿論、作家的な処女性も、節操も、潔癖性をもすべて失つてゐる。
정치의 문화면에 대한 움직임은 지금으로서는 완전히 정치는 관념의 중립인으로서 그 역할을 다 하고 있으며 火野의 문장이 나오고 안나오고에 불구하고 병사對작가 혹은 병사對국민 혹은 정치對문학이라고 하는 두 개의 대립적인 관념체의 중개인적 역할을 다하고 있어야만 할것이며 병사의 용기라 하는 것은 적에 대한 불복종,저항 등을 가지고 표현되는 우수한 병사가 그러하듯이 작가정신에 있어서도 용기라고 불려지는 것은 병사의 용기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며 시험삼아 처녀의 몸 어딘가에 조금이라도 손을 대어 보면__그녀는 처녀 특유의 결벽에서 펄쩍 뛰면서 놀랠것이며 현재의 작가는 그것에 반하여 정치라고 하는 것에 몸전체를 내맡겨도 그 것에 불감증으로 되고 있으며 그것만이 아니라 행실이 좋지 않은 여자처럼 큰 소리로 웃으면서 이 이상은 안된다고 하는 교태를 보여 그곳에는 작가적 용기는 물론 작가적인 처녀성도 정조도 결벽성도 모두 잃고 있다.
ある西洋の政治家は「羨望は政党の保姆である――」といつてゐるが、政党人が政党人である目的の中には、なんとかして大臣まで漕ぎつけたいものだといふ、幼児と共通した羨望の心もあらう、その他物質的な満足を目標として加へられてゐないこともあるまい、昨日羨んだ立場が、今日羨まれる立場に立ちたいといふ、この政治を羨望する心理を、保姆が子供をあやすやうに、その心理の利用によつて、政党を眠らしたり、眼覚めさしたりする、政治家を羨望する心は意外にも文学者の心の中にじつに沢山隠されてゐた、保姆が活躍を始め××懇話会なるものが雨後のタケノコのやうに生みだされた。
어느 서양의 정치가는<선망은 정당의 보모이다__>라고 하는데 정당인이 정당인인 목적안에는 어떻게 해서던지 대신까지 휘젓고 싶은것이다 라고 하며 어린아이와 공통한 선망의 마음도 있을듯 하고 그 밖에 물질적인 만족을 목표로 하여 첨해지지 않은것도 없으며 어제 부러운 입장이 오늘 부러움을 받는 입장에 서고 싶다고 하여 이 정치를 선망하는 심리를 보모가 아이를 달래듯이 그 심리의 작용에 의하여 정당을 재우거나 깨우거나 하며 정치가를 선망하는 마음은 의외로 문학자의 마음 속에 실로 엄청나게 숨겨져 있어 보모가 활약을 시작하여 xx간담회라는 것이 우후죽순처럼 생겨 난것이다.
作家が時の政府の文化政策に応じて、政治家と接触してゆくことは、確に良いことに違ひない、非常時下の政策である、その政策の性質の如何を問はず、それに無条件的に賛成してをれば無事な筈である。
작가가 그 당시의 정부 문화정책에 응하여 정치가와 접촉해 간다는 것은 확실히 좋은것임에 틀림이 없으며 비상시하의 정책이고 그 정책의 성질 여하를 불문하고 그것에 무조건적으로 찬성하고 있으면 무사할 뿐이다.
そこまでは難がない、しかし第三者がこれに対して、何事か批判めいたことを言つた途端に、国策作家はたいへん腹をたてる、その腹の立て方は、作家同士の言ひ方ではなく、まるで政府の要人にでも出世したかのやうな口ぶりで、「おれは国策に副つた作家行動をしてゐるんだ――君はそれに反対めいた言ひ方をするが、今は国家も多難な時だ。君のやうな作家こそ時局身中の虫けらだ――」
거기까지는 어려움이 없지만 그러나 제삼자가 이것에 대하여 무언가 비판이 담긴 것을 말 했을 때에 국책작가는 대단히 화를 내고 그 화를 내는 쪽은 작가동지의 말이 아니고 마치 정부요인에라도 출세한것 같은 말투로<나는 국책에 보좌하는 작가행동을 하고 있습니다__당신은 그것에 반대조의 말을 하지만 지금은 국가도 다난한 시기입니다.당신과 같은 작가야 말로 시국속에 파뭍힌 땅강아지다__>
といつた言ひ方をするのである。これらの作家は、あはよくば自分達の批判者連(れん)のすべてに「国賊作家」といふ名前でもつけかねないのである。
라고 하는 말투를 하는 것이다.이러한 작가는 어쩌면 자신들의 비판자 일행 모두에게<國賊작가>라고 하는 이름도 붙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作家の値打といふものは、国策であれ、政策であれ、その政治的動きの中でその価値を決めることはできない。作家の真個(ほんと)うの値打といふものは、その作家の生活が民衆的基礎にたつてゐるかどうかによつて決まるのである、政治が作家をお叱りになることはよろしい、しかし少くとも作家同士の間では、批判の自由位は保たれてゐていゝ、作家が政治家の口ぶりを真似て、相手の作家を叱りとばすやうな文章を書く態度などゆるされない。
작가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국책이고 정책이며 그 정치적 움직임 안에서 그 가치를 결정할수는 없다. 작가의 진정한 가치라고 하는것은 그 작가의 생활이 민중적 기초에 서 있는가 아닌가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며 정치가 작가를 비난한다고 하는 것은 바람직 한데 그러나 적어도 작가동지 사이에서는 비판의 자유정도는 보장되어 있어도 좋으며 작가가 정치가의 말투를 흉내 내어 상대의 작가를 힐책하는듯한 문장을 쓰는 태도등은 허용될수 없다.
私は真の国策作家などは、これから現れるもので、いまの処の国策作家などの大部分は、お調子者飛び上り者の類だと考へてゐる、政府そのものも、作家に求めるものは、狐を馬にのせたやうなキョロキョロした国策作家でなく、沈着な、着実な真の国策的な人と、作品とを期待してゐるにちがひない。
나는 참다운 국책작가 등은 이제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지금의 국책작가등의 대부분은 줏대가 없이 나서는 자들의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정부 그 것도 작가에 바라는 것은 여우를 말위에 태운듯한 어수선한 국책작가가 아니고 침착하며 착실한 참다운 국책적인 인간과 작품을 기다리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作家が政治家と協力して、文化政策にのりだすことは、これまでの文壇的、或は個人的動きとちがつて、少くとも公的な意味をもつやうになるから、彼の書く作品に対する批判は、いよいよもつて厳正であつてよい、国策文学を、同意と服従とによつてのみ成り立つなどといふ考へ方をもつては、かへつて国策と離れること甚だしいものがあらう、日本に生命をうけ、そこの土壌に生きてゐる人間が、殊更に「日本主義」を唱へなければならないほど薄弱な存在であつてはをかしい、国策を唱へなければ、小説を書くことに不安を感ずる作家は、その類である。
작가가 정치가와 노력하여 문화정책에 편승하는것은 이제까지의 문단적 혹은 개인적인 움직임과 달라 적어도 공적인 의미를 갖는듯이 되기에 그가 쓴 작품에 대한 비판은 더욱 더 엄정하여도 좋으며 국책문학을 동의와 복종에 의해서만 성립한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가져서는 오히려 국책과 멀어지는 정도가 심할것이고 일본에 생명을 받아 그 토양에서 살고 있는 인간이 특히<일본주의>를 부르짖지 않으면 안될정도로 박약한 존재이어서는 의아스러우며 국책을 부르짖지 않고서는 소설을 씀에 불안을 느끼는 작가는 그러한 부류이다.
作家は国策に呼応するばかりが能でない、その以前に、自分が国民的自負を、作家としてでなく、一市民としてもつてゐるかどうかを吟味してかゝる必要がある、真に国民的自負と誠実とを持ち得たならば、人に対しても、また政策に対しても、それが吟味の自由も保留されてゐる筈である。
작가는 국책에 호응하는것만이 능사가 아니며 그 이전에 자신이 국민적 부담을 작가로서가 아닌 한 시민으로서 가지고 있는지 어떤지를 음미해 나갈 필요가 있으며 진실로 국민적 자부와 성실을 가지지 않는다면 남들에 대해서도 또 정책에 대해서도 그것이 음미의 자유도 보류되어져야 함은 당연하다.
政策とは一つの原則であつても、それをもつて、人間心理の細かな部分にわたつての「性質」として当てはまるとは言はれない、原則の丸呑みをやらうとする作家は、鯨が海の水を呑み乾さうとするやうなものだ、その上文学といふ海の自由にあきたらず、御時世のあげ潮を利用して、政治の岸にのしあがつた、自然科学者に言はせると、鯨は陸に体を露出すると、彼自身の重味と、圧力とで内臓が潰れて死ぬといつてゐる、水から離れたものの当然な運命なのである、もつとも現在政治の岸を騒がしてゐるものは、鯨よりは幾まはりも小さいイルカの群である。
정책은 하나의 원칙이라 하여도 그것을 가지고 인간심리의 세세한 부분에 걸친 <성질>로서 맞춘다는것은 말이 안되며 원칙을 통째로 꿀꺽 삼키려고 하는 작가는 고래가 바닷물을 완전히 삼켜 마실려고 하는것 같으며 게다가 문학이라고 하는 바다의 자유에 만족하지 않고 時世의 밀물을 이용하여 정치의 언덕으로 급상승한것이고 자연과학자의 말에 의하면 고래는 육지에 몸을 노출하면 그 자신의 무게와 압력으로 내장이 짜부러져 죽는다고 하며 물에서 떠난것의 당연한 숙명으로 더우기 현재 정치의 언덕을 소란스럽게 만들고 있는것은 고래 보다는 몇할은 작은 돌고래 무리이다.
何時の時代でも、政治的でなかつた時代はないのに、作家との関係で、現在殊更に強く政治を感じ政策に呼応し、それと関係を結ばないではをれない現象が起きたのは、どういふわけか、それは今度の日支事変なるものが作家をさういふ立場に追ひ立てた、事変は、歴史的に言つては少しの無理もなく、当然起るべきものとして必然的に――一方作家にとつては、寝耳に水の突発的な偶然さ――で現れた、それによつて作家の個人性の正体が、いやでも証明されたのである、事変に対応して、そこに生活する作家の姿といふものほどその作家のこれまで隠されてゐたその本質をいまほど明らかに示したことはない。
어느 시대에도 정치적이 아니었던 시대는 없었음에도 작가와의 관계로 현재 더더욱 강하게 정치를 느끼는 정책에 호응하여 그것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되는 현상이 일어 났던것은 어떤 이유인가?그것은 지금의 일지사변의 사태가 작가를 그러한 입장으로 몰아 세웠으며 사변은 역사적으로 말하면 조금의 무리도 없이 당연히 일어나야 할것으로서 필연적으로___한편 작가에 있어서는,청천벽력과도 같은 돌발적인 우연성___으로 나타나 그것에 의하여 작가의 개인성의 정체가 어떻게든 증명된 것이며 사변에 대응하여 그곳에 생활하는 작가의 모습이라 할 정도로 그 작가의 이제까지 감추어져 있던 그 본질을 이제 와서 명백히 나타낸 것은 아니다.
社会環境が、否応なしにその作家の本質を浮びあがらせ、その書くものや、行動の端々にも、よくその作家の本性を現してゐる、ある従軍婦人作家が、同行の男作家の靴を船中で磨いてやつたとか、傷病兵の足の長くのびた爪を切つてやつたとか、いふ記事を読む途端には、読者はこの女流作家を女でなかつたと思ひこんでゐたのが急に女であつたのだと思はせるほど、女性的な優しい行為のやうに感じられる、しかし作家が傷病兵の足の爪を切つたことは、ニュースや文学的作品にはなつても、無名の一従軍看護婦が、傷病兵の鼻汁をかんでやつたといふ愛と犠牲の行為は、彼女の立場が当り前であるといふ意味で、ニュースにはされてゐないのである。
사회환경이 贊反 없이 그 작가의 본질을 노출 시키어 그 작품이나 행동의 구석 구석에도 충분히 그 작가의 본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어느 종군 부인작가가 동행한 남자 작가의 신발을 배 안에서 닦아 주었다건가 부상병의 길게 자란 발톱을 잘라 주었다건가 하는 기사를 읽는 동안에는 독자는 그 여류작가를 여자가 아니었다고 생각해 왔던것이 갑자기 여자였다 하고 생각하게 할 정도로 여성적이고 자상한 행위처럼 느껴지는데 그러나 작가가 부상병의 발톱을 잘른 것은 뉴스나 문학적 작품은 아니라도 무명의 한 종군 간호부가 부상병의 콧물을 닦아 주었다고 하는 사랑과 희생의 행위는 그녀의 입장이 당연하다고 하는 의미로 뉴스는 되지 않는 것이다.
こゝで国民的平等さをもつて、女流作家と、無名看護婦とを論ずる場合には、むしろ作家は、正しい文章を書かなければならぬといふ義務の遂行のかはりに、兵士の爪を切つたといふ行為は、その行為の正しさに拘らず矛盾を示してゐる、殊にそのことを特別に過大に評価される理由は少しもない。
여기서 국민적 평등을 가지고 여성작가와 무명 간호부를 논하는 경우에는 오히려 작가는 바른 문장을 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의무의 수행 대신에 병사의 손톱을 잘랐다고 하는 행위는 그 행위의 올바름에도 불구하고 모순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그 것을 특별히 과대하게 평가될 이유는 조금도 없다.
読者が作家から求めてゐるものは、作家が兵士の爪を切つてやつたといふ報道もよいが、それよりその傷病兵の爪がどのやうにのびどんな色をしてゐたか、どのやゝう[#「どのやう」の誤記と思われる]に痛さうであつたか、看護婦達が、どんなに爪を切つてやる暇もないほど、手が廻らない忙しさであつたか、その献身的な状態、その生々しい描写をこそ作家が伝へてほしいのである、今では従軍作家で、あまり「自己を語りすぎる作家」は従軍の資格を失ひつつある。
독자가 작가로부터 바라고 있는것은 작가가 병사의 손톱을 잘라 주었다고 하는 보도도 좋지만 그 보다는 그 부상병의 손톱이 어떻게 자라서 어떤 색을 띠고 있었나 얼마나 아팠던가 간호부들이 어떻게 손톱을 잘라줄 틈도 없을 만큼 손이 가지 않아 바빴던가 그 헌신적인 상태 그 생생한 묘사야말로 작가가 전해 주었으면 하는것이고 지금은 종군작가로 너무 <자신을 지나치게 말하는 작가>는 종군의 자격을 잃어 가고 있다.
政府が文化政策として、作家を動員する場合の、その方法、人選、作品は、案外予期に反した微妙な結果を産みだすだろう、作家の中には、戦争文学を書きたいといふ欲望もなく、ただ自己の作家として道徳的位置を、かういふ際に決めておきたいばつかりに、その時の政策と、自分とが、少しも矛盾してゐない――といふ連帯的信念を、世に広く広告したいばかりに、すすんで国策に応ずる作家もありさうだ。
정부가 문화정책으로서 작가를 동원하는 경우의 그 방법,人選,작품은 의외로 기대에 反한 미묘한 결과를 가져온듯 하며 작가 가운데에는 전쟁문학을 쓰고 싶다고 하는 욕망도 없이 그저 자신의 작가로서 도덕적 위치를 이러한 때에 결정해 놓고 싶을뿐으로 그 시대의 정책과 자신이 조금도 모순되어 있지 않다__라고 하는 연대적 신념을 세상에 널리 광고하고 싶을뿐으로 나아가서는 국책에 응하는 작가도 있는 듯하다.
政治と作家の連帯性は、そのズルサに於いて結ばれるものではなく、誠実に依つて結合されるべきであらう、為政者はその文化的政策において、真に国家的に有能な作家を求むべきで、単なる政策の追従者を政策の中に繰入れるべきではないと思ふ、殊に作家の人気などは全くソロバンに加へられない、六十九連勝の双葉山も、三度の連敗で、三度目には観客は蒲団も飛ばさないのである、国民が人気といふものより、その現実的本質に於いて、いかに冷静で批判的であるかといふ、人気に関しての良い証拠であらう。
정치와 작가의 연대성은 그 교활함에 있어서 연결된것은 아니며 성실에 의하여 결합되어야만 할 듯하고 위정자는 그 문화적 정책에 있어서 진실로 국가적으로 유능한 작가를 찾아야 할것으로 단순한 정책의 추종자를 정책 안으로 들여 놓아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특히 작가의 인기 등은 전혀 주판에 올려져 있지 않으며,69연승의 双葉山도 세 번의 연패로 세 번째에는 관객은 방석도 던지지 않는 것으로 국민이 인기라고 하는것 보다 그 현실적 본질에 있어서 얼마나 냉정하고 비판적인가 하는 인기에 관한 좋은 증거일것이다.
時局斷想
鰐と理論家(악어와 이론가)
最近私は他人の文章を読んで驚いた、その文章はいきなり読者の顔に鉄仮面をかぶせるといつた窒息的な内容をもったもので、それは早大教授法学博士中野登美雄氏の文章であつた、日本にも斯ういふ優れた全体主義学者がゐたことに驚いたのではない、事変下の物資調整といふことは、日本の現状では、老い先の長い、なかなか死にさうもない年寄のために、杖を倉庫一杯貯へてをくとか、短命な若者のために、額にあてる三角の白い布を用意してをくといつた性質のものばかりではない、物資調整とは、いまでは人も物も区別がない、貯へてをき、使用しないといふ調整ではなく、当座の間に合ふといふことも肝要であらう、時節柄日本に中野博士のやうな全体主義的な学者が現はれたといふことも、また当座の間に合つたといふ意味で慶賀すべきことかも知れない。
최근 나는 타인의 문장을 읽고 놀랐는데,그 문장은 갑자기 독자의 얼굴에 鐵假面을 씌운다고 하는 질식적인 내용을 갖는 것으로,그것은 와세다 대학교수 法學博士 中野登美雄(나까노토미오)氏의 문장이었으며 일본에도 이러한 훌륭한 전체주의 학자가 있었음에 놀란것은 아니며 事變下의 물자조정이라고 하는것은 일본의 현상에서는 남은 餘生이 길고 좀처럼 죽을것 같지도 않은 노인들을 위하여 지팡이를 창고 가득히 저장해 놓는다던가,短命한 젊은이를 위하여 이마에 붙이는 삼각형의 하얀 천을 준비해 놓는다고 하는 성질의 것만은 아니며 물자조정이라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사람도 물자도 구별이 없이 저장해 놓고 이러한 시절에 맞게 일본에 나까노 박사와 같은 전체주의적인 학자가 나타났다고 하는것도 또
당면한 시점에서 맞는다고 하는 의미로 慶賀해야만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中野博士は改造二月号の『憲法、政治、総力戦』でも述べてゐるやうに、政治を離れて戦争などないし、戦争の可能性を伴はない政治は存在しないし、考へられもしない――とはつきりと主張してゐる、それから『戦争は国家に依つて吸収されるが、国家を吸収するものではない――』ともいつてゐる。
ある酒好きの酔払ひの大学教授が、ビヤホールの亭主に、WCは何処だときいたとする。私がそこの亭主なら、かう答へてやる『先生の理論によれば、ビールは人間によつて吸収されるが、人間を吸収するものではないさうですから小便なんかする必要がないではありませんか、そのうちに全部吸収しますよ、がまんなさい――』といつてやるだらう、しかし彼は尻をもぢもぢさして落着かない、この全体主義者も、自分の体についてゐる小さな一部分を制禦することが遂にできなくなつて、他人に気づかれないやうな方法で、理論を洩らして周囲を汚す位のものだ、一個の海綿を屠殺場の床の上に投げてみたまへ、『血は海綿によつて吸収されるが――海綿を吸収するものではない――。』といふ海綿の中野登美雄氏流論がそこに成りたつだらうか、海綿が屠殺場の血をあふれるほど完全に吸収しきつたときは、海綿は一個の海綿であると同時に、一個の血の塊でもある、海綿といふ組織物体が血をもつて充満されたといふことは、ここでは立派に血が海綿を吸収したと言ふ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
나까노 박사는 改造 2월호의<헌법,정치,총력전>에서도 언급해 있듯이 정치를 떠나서 전쟁등은 없으며 전쟁의 가능성을 동반하지 않는 정치는 존재하지 않으며 생각할수도 없다__라고 확실하게 주장하고 있으며,그래서 <전쟁은 국가에 의하여 흡수되지만,국가를 흡수하는것은 아니다__>라고도 말하고 있다.
어느 약주를 즐기는 술꾼인 대학교수가 beer hall의 주인에게 WC는 어디냐고 물었다고 한다.내가 그 주인이라면 이렇게 대답해 준다<선생의 이론에 의하면 beer는 인간에 의해서 흡수 되지만 인간을 흡수 하는 것은 아닐듯하니 소변 따위는 눌 필요가 없는것은 아닙니까? 그 동안에 전부 흡수하세요! 참으세요!__>라고 말해 줄것이라,그러나 그는 엉덩이를 꿈찔 꿈찔대면서 안절부절 못하니 이 전체주의자도 자신의 몸에 붙어 있는 조그만 일부분을 제어하는 것이 끝내는 할 수가 없어서 타인에게 눈치 채이지 않는듯한 방법으로 이론을 흘려서 주위를 더럽힐 정도였으며 한 개의 海綿을 도살장의 상 위에 던져 보았으며,<피는 海綿에 의해서 흡수되지만___海綿을 흡수하는 것은 아니다___>라고 하는 中野登美雄氏(나까노토미오씨)流論이 그곳에 성립 된듯하나___海綿이 도살장의 피를 넘치게 할 정도로 완전히 흡수해 버렸을 때는 海綿은 한 개의 海綿인 동시에 한 개의 핏덩어리이기도 하며 海綿이라고 하는 조직물체가 피를 가지고 충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여기서는 훌륭하게 피가 海綿을 흡수 하였다고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それどころか血の池に放された海綿は、ぽかんぽかんと浮き沈みさへすることができる、だがこゝに屠殺場には、都合のよいことには、学問的な、或は非学問的な牛殺し共がゐて、海綿をリズミカルに、間ををいて、タンゴかなにか歌ひながら、靴の先で踏んだり離したりする、そのたびに吸収されたものを出したり、吸はしたりする、そして彼等はうそぶく『み給へ、海綿は血に吸収されてなどゐないぢやないか――』と、しかしこの理論的音頭取りは一瞬間も、海綿の上の靴のタンゴをやめるわけにはいかない、靴の運動をやめた途端に、海綿はあふれるからである、ドストヱスキイ[#「ドストイヱフスキイ」の誤記と思われる]はこの種の理論家を指して『鰐の腹の中の理論家』と呼んだやうだ、鰐といふ権威のするどい歯に護られながら、その腹の中から理屈をいふ、手のつけられない、理論家や作家、をいつたもので、この人々は少しも恐ろしくないが、この人々を擁護してゐる、権威にガブリとやられるのが恐ろしいのである。
그것 뿐인가 피의 연못에 던져진 海綿은 뽀르륵~뽀르륵~하며 떳다 가라 앉기 조차 할 수가 있으며, 허나 여기 도살장에는 사정이 좋은 것으로는 학문적인 혹은 비학문적인 소의 코뚜레를 한 동지가 있어 海綿을 리드미칼하게 사이를 두고 탱고인지 뭔지를 노래 하면서 구두 끝으로 밟았다가 띠었다가 하고그 때마다 흡수 된것을 빼기도 하고 빨기도 하며 그리고 그들은 외쳐 대기를<보라!海綿은 피에 흡수된다고 하는것은 아니지 않는가?__>하고,그러나 이론적 先唱은 일순간도 海綿위의 구두 탱고를 멈출수는 없어 구두의 운동을 멈춘 순간에 海綿은 넘치기 때문이니,도스토에프스키는 이러한 종류의 이론가를 가리켜 <악어 뱃속의 이론가>라고 부른 듯하며 악어라고 하는 권위가 날카로운 이빨에 보호를 받으면서 그 뱃속에서 논리를 말하며 손이 닿지 않는 이론가나 작가를 말한 것으로 이러한 사람들은 조금도 무섭지 않지만 이 사람들을 옹호하고 있는 권위에 꿀꺽~하고 당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無任所の月 <無任所의달>
小熊秀雄(오쿠마 히데오)
ドイツの有名な詩人が『老人を衰へさせるものが、若者を勇気づける――。』といふ詩句を吐いた、それはドイツの昔の話である、日本の状態は、その詩句とは逆だ、『若者を衰へさせるものが、老人を勇気づける――』やうである、為政者は御存知かどうか知らないが、現在の日本の青年層の無気力と、心理主義的状態は底をついてゐる、これらの青年達は、戦に強い以外に、能力の種類を発揮してゐないのである、その点から言ふと、平沼首相の七十三歳を始めとして、日本の政治的、資本的中軸を握つてゐる老人達の、肉体的頑強さは、若者の比ではない、ことに政治家の長寿は不思議な現象で、それは、平素から牡蠣のオジヤを喰つたり、生卵を三個も、しかも殻のまゝ一度に嚥み下したりして、陽のあたる叢に長々と体をあたためてゐる、そして政変と同時に、頭を擡げるといふ、平素の養生が精力を貯へてゐるのだらう、老人組の政界登場は、平沼首相が世間で評判するほど、ファッショ好きでも、全体主義者でもなく、老人の美点であるところの協調主義者であることをみても判る、イデオロギー的には、修養団的礼拝主義者で、祭政一致の主張者である。
독일의 유명한 詩人이<노인을 쇠약하게 하는것이 젊은이에게는 용기를 준다__>라고 하는 詩句를 토해 냈으나 그것은 독일의 옛날 이야기이며,일본의 상태는 그 詩句와는 逆으로<젊은이를 쇠약하게 하는 것이 노인에게는 용기를 준다__>같은 것이며 위정자는 잘 아시는지 어쩔런지는 모르나 현재의 일본의 청년층의 무기력과 심리주의적 상태는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러한 청년들은 싸움에 강한 이외에 능력의 종류를 발휘하고 있지 않은 것이며 그런 점에서 말하면,히라자와 首相이 73세를 시작으로 하여 일본의 정치적,자본적 중심을 쥐고 있는 노인들의 육체적 완강함은 젊은이와 비할바는 아니며 특히 정치가의 장수는 이상한 현상으로 그것은 평소부터 전복죽을 먹거나 날계란을 세 개나 그것도 껍질채로 한번에 삼키거나 하고는 햇볕이 비추는 숲에서 늘어지게 몸을 따뜻이 하고 ,그리고 政變과 동시에 머리를 치켜 들고 말하며 평소의 양생이 정력을 비축하고 있는 듯하며 노인들의 정계 등장은 히라자와 首相이 世間에서 평판하는 정도로 fashion취향도 전체주의자도 아니고 노인의 美點이라고 하는 점의 협조주의자인것을 보아도 알수가 있고 ideology적으로는 修養團的예배주의자로 제정일치의 주장자이다.
どの点からみても穏健であつて、その政治のやり口には、平素の碁のやり口で、民衆の額にピシリと石をうつやうなことはやるまい、白はファッショで、黒は死の象徴だから、どつちの石をうたれることも、民衆にとつては有難くない、この老齢者の平沼政府にも、時代の良き反映としての、近衛さんのやうな心理主義者が必要であつたといふことは、日本の政治史に特記すべきであらう。
어느점으로 보아도 온건하고 그 정치의 행위에는 평소의 바둑 두기로 민중의 이마에 딱~하고 돌을 놓을려고 해서는 안되며 白은 fashion이요 黑은 죽음의 상징이니 어느쪽 돌을 놓는 것도 민중에 있어서는 고맙지 않고 이 노령자의 히라자와 정부에도 시대의 좋은 반영으로서의 코노에 상과도 같은 심리주의자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일본의 정치사에 특기 해야만 할 것이다.
踏切りの悪い太陽が、空に昇りはしたが、足もとが定まらず、一日中空をひよろひよろしなければならなかつたやうに、そしてこの眼先の利く太陽は、完全に山の端に隠れることをしないで、真昼間、とつぜん右に切れて空から姿を隠してしまつた、国民はそのため日蝕の日の鶏のやうに、ゴッゴッと鳴きながら、夜になつたと感違ひして、止り木にかへり始める、と急にシワだらけの太陽が昇つて世間を明るくする、しかし状勢は、世間に二つの太陽を必要とするほど暗い、日本の現状では、近衛さんのやうな陽性な総理大臣が是非必要なのである、しかし宇宙に二つの太陽を昇らすことは真理にそむくので、月とは―光度の上では、太陽が頬冠りをしたものなり、といふ見解をたてゝ、無理やりに頬かぶりをさせられた太陽が、夜になると引出されたのである、政治的理由が確認されなくても、かくして無任所の月は認められることになつた。
뜀틀판이 안 좋은 태양이 하늘로 올라는 갔으나 발을 내릴곳이 정해져 있지 않아 하루 종일 하늘을 휘청휘청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처럼 그리고 이 눈이 밝은 태양은 완전히 산 끝으로 숨으려 하지 않고 한 낮 동안 갑자기 우측으로 꺽어서 하늘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렸으며 국민은 그 때문에 日蝕의 해의 닭처럼 꼬끼요~하고 울면서 밤이 되었다고 착각하여 보금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하였으며 갑자기 주름 투성이의 태양이 올라가 세상을 밝게 하고 그러나 상태는 세상에 두 개의 태양을 필요로 할 만큼 어두우며 일본의 현상에서는 코노에 상과 같은 陽性적인 총리대신이 반드시 필요한것이고 그러나 우주에 두 개의 태양을 올리게 하는 것은 진리에 위배하는 것으로 달과는___光度상으로는 태양이 두건을 쓰게 된것이다 라고 하는 견해를 세워서 무리하게 두건을 뒤집어 쓴 태양이 밤이 되면 끌려 나왔던 것이고 정치적 이유가 확인되지 않아도 이렇게 하여 無任所의 달은 인정을 받게 된것 이었다.
しかし円満な思想をもつたシワだらけの太陽や、心理的な頬冠りをした月を、すべての民衆はその円満な丸さに仰ぐであらうか、それは栄養のたりた階級は、太陽や月をその丸さで認めはするだらうが、栄養の足りない階級は、丸い太陽や月も、とかく三角に見たがるものである、しかしそれは太陽や月の形態に責はない、国民の鋭角的な眼のせいである、この尖つた部分を丸く穏かなものにするには、どうしても心理主義的なヤスリ屋が必要である、この巧な鋸の目立て屋は、なるべく鋸にキイキイ非鳴をあげさせないやうにしながら、その尖つた部分を使ひものにならないやうに丸くへらすのである。
그러나 원만한 사상을 가진 주름 투성이의 태양이나 심리적인 두건을 쓴 달을 모든 민중은 그 원만한 동그라미를 우러러 볼것인가?그것은 영양이 충분한 계급은 태양이나 달을 그 원으로 인정 할것이지만, 영양이 부족한 계급은 둥근 태양이나 달도 어쩌면 삼각형으로 보고 싶은것이고 그러나 그것은 태양이나 달의 형태의 책임은 아니며 국민의 銳角적인 눈 탓이고 이 뾰족한 부분을 둥글고 온건한 것으로 하려면 아무래도 심리주의적인 야스리 집이 필요하고 이 교묘한 톱날을 세우는 집은 될수 있는 한 톱이 끼익~끼익~ 비명을 질르지 않도록 하면서 그 뾰족한 부분을 사용하지 않도록 둥글게 줄이는 것이다.
大臣の人氣
政治といふものは、板の両方の端を、ガタン、ガタンと上げたり下げたりする、子供の跳ね板遊びのやうなものらしい、近衛さんが下つた途端に、平沼さんが上るといふ仕組になつてゐたらしく、近衛さんは平沼内閣を地面に激突させまいとして、しづかに降りようとしたが、その探なさけが、近衛さん自身の降りる機会を失はした、近衛さんは当分板の上で、平沼内閣の音頭ではなく、調子をとるのであらう。
近衛さんの人気に就いては、それは国民の心の状態がそれを説明することができるだらう、内閣が組織された当座は、民衆は新しい内閣に花をもたせるものである、政府が国民に大入袋を出さないにしても、国民は先ず新内閣に、心の御祝儀を出す位の礼儀はわきまへてゐる、しかし国民が政府に対して花のもたせ方にも色々あつて悪人気の政府に対しては、全く水揚げの利かない造り花を贈るといふやり方もある、二・二六事件の時などがさうであつた、閣僚の邸宅の前の車道人道を、黒いリボンがひらひらついた花でみたすといふやり方だ。
しかし大体に於いて、内閣はその寿命の長さを三つに割つてその最初の一つ位の期間は、首相や諸大臣たちの『人格を満足する――』といふことで、国民もぼんやりと時を経過させるものである。
近衛さんの人気の良かつたのも、その人格の満足の期間が国民にあつたからで、つまり寿命の三分の一の経過で、勇退した近衛さんは、国民に対して何か余韻をのこした、近衛さんは官僚主義にかはるものとして、実量(じつれう)主義をもつてした、類人猿は足で蹴あげた食物を口で受けとめるが、器用さの点では、事変と文化とを操るといふ、近来の政治家としては珍しい両手利きのところがあつた、そこに近衛さんらしい幾多の人柄と人間味を示すものがあつた、たとへば近衛さんは、親子の恩愛の絆が断ちがたくて、自分の子息を秘書官にするほど人間味豊でもあつた。
政治といふものを、親と子といふ家族的規範の中にをくといふことは好ましくないだらう、しかし近衛首相が官邸を出るとき『お父さんネクタイが曲つてをります――』といつた細部にわたつての心使ひのできるのは、やはり他人の秘書官より、息子の秘書官でなければ果せないことだらう、近衛さんのやうなデモクラチックな首相の出現は、をそらく日本の政治史の最後の人となるのではないだらうか、もつともこゝでいふデモクラシーといふのは、今世間に攻撃されてゐる自由主義とはちがふ、少しの懸念もいらない貴族的自由主義のことである。
一平民が或る日貴族を訪ねた、帰りかけると貴族は玄関まで送つて出て、その上客にオーバーまで着せてくれた、客は貴族の自由主義的な態度に恐縮して、涙を流さんばかりに感激した。
其後所用で再び貴族を訪ねたが彼は用談の最中にも、貴族が平民である自分にオーバーをかけてくれる喜びに胸をワクワクさしてゐた、さて帰るとなると今回は容子がちがって、貴族は応接室の安楽椅子に寝そべつたまゝでかういった。『君、オーバーを着せてあげよう、持つて来給へ――』と、貴族の自由主義とは、風向き次第でどうにでも変るムラ気なものだなと、その客は大いに感心したといふことである、貴族的自由主義は庶民的自由主義とはちがつて、そのムラ気の故に安全感の多いもので、したがつて安全なものは国策の線にも添ふ可能性が多いのである。
砂糖と宜撫
興亜議会は無気力だと言はれてゐる、しかしそれは国家総動員法といふ、法的なものの完全な発揮が、さうさしたのであると善意に解しておかう、速決主義、問答無用である、この国家総動員法は、国民も議員をも失語症に陥らせた、議場での代議士達は、舌の長さを極度にもち扱ひかねて、辛うじて呼吸も絶え絶えな声で『異議なし』『異議なし』といひながら、どんどんと議事を進行さしてしまふ、もし鸚鵡や九官鳥に被選挙権があつたら、次回の総選挙には人間を議会にをくる必要があるまい、この鳥達は仕込みさへすれば、舌の短さを極度に有効に働かして、すくなくとも東北弁の代議士よりは発音も正しく『イギナシ』『イギナシ』位は言ふであらう。
傍聴席に青大将を放す馬鹿者も現れず、閣僚に防弾チョッキを寄贈するあわて者も居ず、このところ平安そのものである、だから守衛達は手持無沙汰で、コクリ、コクリと居眠りをする議員達の額に、ハッカ水を筆で塗つて歩くと、議員達はハッと眼をさまし、自分達が廃墟に腰掛けてゐるやうな錯覚をおこす、しかしこの切れ切れの断続的な、眠りの中に『時』は通過するのである、ハッカ水で眼がさめたときは六十億の軍事予算も通過する、お伽話の中の騎士が、勝利のための魔力を発揮するには、国民といふ巨人の眠つてゐる間に、その鼻の穴から、六本の鼻毛を盗まなければならない、この六本の鼻毛は一年かかつて燃えつきるもので、味方にとつては薔薇の匂ひがするが、敵にとつては死臭がする、しかし折々風向きが変つたときは、味方も死臭を嗅がなければならない、騎士はまんまと、あらゆるものの眠りの間に鼻毛を得た、巨人は昏酔の間に、あるだけ鼻毛をぬかれ、はげしくクシャミをし、次いで咳がつづいた、やがて平和がやつてきたが、巨人にとつては、それからが本格的な痙攣の時代に入るのである、俗に悪感と呼ばれる症状で、ガタガタと歯の根も合はないほど、寒いやうな、また身内が熱いやうな症状がやつてくるのである。
支那はいまさうした悪感の状態である、ただ彼等は自分の鼻毛を燃やさずに、英米仏蘇できることなら、敵国である日本の鼻毛を燃やさうとしてゐる、彼等は日本が憎くて戦争をしてゐるのではない、抗日が可愛くて戦争をしてゐるのである、日本もまた支那民衆は敵でなく、蒋政権が敵だとはつきり言つてゐる、支那難民に日本の宣撫班がキャラメルを配ると、子供に混つて大人までが手を出す、彼等の口に甘味ののこつてゐる間に、すべての宣撫工作をしてしまふ必要がある、占拠地域の支那民族を、完全に砂糖づけにしてしまふには、それに応じて奥地の支那民衆を塩漬けにしてしまふために、信玄の古事にならつて、敵国に塩を送る雅量もいるだらう、しかし議会では我国の砂糖と塩の貯蔵量に就いて大臣に質問した議員は一人もゐない、支那国民は蒋介石の政治的甘言をもう信じない、どこの国からでも、ほんとうの砂糖をなめさして貰ひたがつてゐる、日本国民もまた政治家の立派な政治的金言を敷布団にし、政治的格言を掛布団にして寝せられてゐるやうなものだ、その政治的甘さといつたら。パイやホットケーキの夜具に包まれて眠らせられてゐるやうなもので、国民はやがて幸福さに溶けるであらう。
強者の焦慮に就て
――諷刺文学のために――
强者の焦慮に就て <强者의焦慮에 있어서>
___諷刺文學のために (1939年)
小熊秀雄(오쿠마 히데오)
諷刺作家が、自己の諷刺的手法の機能がどんなに有効なものであるかといふことに、自信をもつことができたら、諷刺することに少しも懐疑的である筈がない、然るに世間には往々にして諷刺作家をもつて自称してゐるものであつても、事実は諷刺作家でも何でもないものが少くない。この種の者は、程度の低い『嘲笑主義者』にすぎないのである、諷刺作家と、嘲笑主義者とは、はつきりと区分する必要がある。
諷刺作家가 자신의 풍자적 수법의 기능이 얼마나 유효한것일까 하는 것에 自信을 가질수가 있다면 풍자하는 것에 조금도 회의적일 리가 없는데 그러나 世間에는 往往 풍자작가를 갖고서 自稱하고 있는것 이었다 하여도 사실은 풍자작가도 아무것도 아닌것이 적지 않다.이러한 종류의 사람을 정도가 낮은 <嘲笑主義者>에 지나지 않으며 풍자작가와 嘲笑主義者와는 확실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これらの嘲笑主義者は、多く諷刺作家を敵に廻してゐるのである。そして諷刺の機能を軽蔑しながらも、その諷刺にかはるものとして、有合せの『嘲笑』を使つてみようと企てる。そしてそれがうまく成功した場合には、自分は諷刺作家であると名乗りをあげて登場しようとする。失敗した場合には、正統な諷刺家を嘲笑し、皮肉つただけで終るのである。
이러한 嘲笑主義者는 많은 풍자작가를 적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풍자의 기능을 경멸하면서도 그 풍자에 대신하는것으로서 마침 있는<嘲笑>를 사용해 보려고 연구한다.그리고 그것이 멋지게 성공한 경우에는 자신은 풍자작가라 하는 이름을 내걸고 등장하려고 한다.실패한 경우에는 정통적인 풍자가를 조소하고 냉소만으로 끝나는 것이다.
私はこれまで諷刺詩を書いてきた関係から、この種の嘲笑主義者に、無数に出逢つてゐる。彼等は斯ういふ『彼は他人の諷刺をしてゐるが、諷刺してゐる彼自身の姿こそ、諷刺されてゐるやうで滑稽である――』といつた批評をするのである。
しかしこれだけの言葉の中から、どれだけの内容を引きだすことができるだらうか、しかし我国の所謂一流の理論家、批評家と自他共にゆるしてゐる人々が、殆んど言ひ合したやうに、諷刺文学に対しての意見の持ち合せが、これだけよりないのである。どのやうなものも口に余さない日本の文芸批評家も、諷刺文学論だけは、口に余した、これだけは挟む箸の持ち合せがなかつた。
나는 이제까지 諷刺詩를 써 온 관계로 이러한 종류의 嘲笑主義者를 무수히 만나고 있다.그들은 이렇게 말하는데<그는 타인의 풍자를 하고 있지만 풍자하고 있는 그 자신의 모습이야말로 풍자되고 있는것 같아 해학이다__>라고 하는 비평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의 언어 속에서 어느정도의 내용을 끌어 낼수가 있을까?그러나 우리나라의 소위 一流 이론가,비평가라 자타 공히 인정하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말하고 있듯이 풍자문학에 대한 의견을 마침 가진것이 이것뿐이며 달리 없는것이다. 어떠한 것도 입에 남아돌지 않는 일본의 문예비평가도 풍자문학론 만은 입에 남아 돌고 이것만은 손가락에 끼울 젓가락을 가질수가 없었다.
一方文学の時流に追従することに熱心な日本の作家達も、諷刺文学だけは襟に巻くことをしなかつた。それは何故にであらう。文学を遊びごとにする人々にとつては勿論諷刺的な文学形式を使ふなどといふことは、少しく峻厳にすぎるからである。ユーモア文学は掃き捨てるほど盛んに生産されてゐる現状にも、諷刺文学の形式上の本質を追求しようなどといふ心掛けをもつてゐるものは全くない、それといふのも、この文学形式は、諷刺する方も、諷刺される側も、各自がもつてゐる『教養と財産』とにとつて危険極りない代物であるから、利巧と名のつく者が、手に触れない種類のものである。ユーモア文学程度で止めてをいて、諷刺文学にまで入らなければ、自己保全は達せられる。小説形式の在来の型を追つてゐる限りでは無事なのである。日本の小説家達も、諷刺的形式に小説を運びこむには、勇気がいることを薄々知つてゐる。社会的テーマに入らなければならないし、従つて外部的な抵抗にも触れなければ優れた仕事が出来ないことも感じてゐる。諷刺文学の仕事の困難な、錯雑さに堪へる力をもつてゐない大部分の小説家が、諷刺的方法の採用を避けてゐるといふことも理由のないことではない。
한편 문학의 時流에 추종하는 일에 열심인 일본의 작가들도 풍자문학 만은 옷깃을 말지 않았다. 그것은 어째서일까?문학을 놀이로 하는 사람들에 있어서는 물론 풍자적인 문학형식을 사용한다고 하는것은 조금은 너무 준엄하기 때문이다.유모어 문학은 쓸어버릴 정도로 한창 생산되고 있는 현상에도 풍자문학의 형식상의 본질을 추구하려 하고 있다고 하는 마음 씀씀이를 가지고 있는것은 전혀 없으며 그것이라고 하는것도 이 문학형식은 풍자하는 쪽도 풍자 당하는 측도 각자가 가지고 있는<교양과 재산>에 의하여 위험하다고 결정짓지 않은 代物이기에 영리하다는 이름이 붙은 자가 손에 접할 수가 없는 종류인것이다.유모어 문학정도에서 그쳐서 풍자문학에까지 들어가지 않으며 자기보전은 달할 수가 있다.소설형식의 재래의 틀을 쫒고 있는한은 무사한 것이다.일본의 소설가들도 풍자적 형식에 소설을 옮겨 놓을려면 용기가 필요함을 희박하게 알고 있다.사회적 테마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며 따라서 외부적인 저항에도 접하지 않으면 훌륭한 작업이 될 수가 없는것도 느끼고 있다.풍자문학의 작업의 곤란과 착잡함에 견딜수가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대부분의 소설가가 풍자적 방법의 채용을 피하고 있는 것도 이유가 없는것은 아니다.
殊に諷刺作家が、かへつて道化者のやうに批評家の眼に映ずるとすれば、さうした諷刺的事業を始めるといふことは、現在のところ、一つの冒険であり、悲劇である。それを押し切つて諷刺文学にすすむといふことは容易なことではない。しかし私は考へるのである。諷刺作家自身が見た眼には、滑稽に見えるやうなことであつても、決して悲しむ勿れ――といひたい。シェ[#「ェ」は底本では「ヱ」の小文字]クスピアの『リア王』の中で、リア王の追従者である『唖呆』と呼ばれる諷刺家が果す役割のことを考へてみたらいい、唖呆は最も遠慮会釈もない態度で、辛辣な言葉を、リア王に投げかける、リア王はどれほどこの唖呆に皮肉られても怒るといふことをしない、彼は実に滑稽な男であつて、それこそ日本の批評家の言葉『諷刺してゐる彼自身の姿こそ諷刺されてゐるやうで滑稽である――』といつた存在である。リア王がこの道化者を必要としたことは、リア王が自己の批判者を、この唖呆といふ従者であり、諷刺家である男に求めてゐたからであつて、追従者であり且つ批判者であるといふ特殊な形の道化者を傍に置くことは、リア王にとつては必要なことであつた、王は最高の位置にあるために、リア王に対して、積極的に意見を述べるといふ役割に立つものはゐない、この道化者『唖呆』だけが、王との日常的な悪ふざけの中で、精々王のやり方に対して批判的な言葉を投げかける。王と唖呆との間には、言葉の上の交際では、階級的区別を全く取りのぞかれてゐる。しかし唖呆が第一流の諷刺家に成り切れない理由、つまり第三流的通俗諷刺家である理由が起つてくる、そのことはリア王の批判も、あまりに真実にすぎるという場合には、お払ひ箱になるといふ場合が起きてくるからである。唖呆がリア王の従者を完ふするには、王を適当に諷刺したり、言ひ過ぎた場合には、お追従笑ひ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こではどのやうな場合でも、主従関係を超越することは不可能な立場にをかれる。
真の意味の諷刺家、或は諷刺作家になるには、一切の主従関係のないところの立場にたたなければならない。文壇の封建的要素である、文壇的主従関係の束縛の中では何事も為すことが不可能である。孤立的であることを恐れてはならないと同時に、対立的になることも、また恐れてはをれない。諷刺作家は、面白がらせるといふ、創作方法に依つて、作家であると同時に、批評的な目的をその作品に附与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は勿論のことである。作家と批評家の両方の機能を一人で果すといふ意味の優れた方法をもたなければならないし、またそこに仕事の面白さも、隠れてゐるのである。
或る匿名批評家が、曾つて私をかう批評したことがある。『彼の諷刺に対しては、誰も問題にしてゐないのに、一人で喧嘩を売つてゐる――』そして次に斯ういふ意味のことをつけ加へる、『一人前にならない小狐が、文壇といふ甘味の豊富な葡萄のなつた棚の下で、指を咬へてゐる格好である――』といふのである。文壇がそんなに豊富な甘味のあるところとは私は思へない、この匿名批評家の口裏には、この筆者が鼻持のならない文壇臭の持主であることがわかる。腹の底から文壇の臭さに染つた批評家の言葉であることが明瞭である。もしこの匿名子のいふやうに、文壇といふ場所が、葡萄のやうな甘さが真個(ほんと)うで、味はつたことのないものには到底理解できないやうな、醍醐味に富んだものだとすれば、少しく理屈の合はないものがある。
それはこれまで私はよく熟した葡萄といふものを見たこともあるし、知つてゐる。この種のよく熟した葡萄といふものは、枝もたはむほどの房であつて、地面に届くほどに垂れ下つたものもある、もし人間共が、この葡萄の枝に棚といふものを作らなければ、見事に地面につくほどに重く熟したものだ。もし匿名子がいふやうに、小狐の口までも届かない高いところにあるやうな葡萄であつたら、もし口が仮りに届いて喰べたところで、酸つぱいか、或は乾あがつたやうな粒にちがひない――と私はこの匿名批評を読んだとき苦笑したのである。
私は読者にむかつて、大体に於いて私の観察が当つてゐることを自信をもつて言ふことができる。文壇などといふ葡萄棚は、棚の高さにあつて、酸つぱい未熟な粒をならべてゐる位がオチである。しかもここの葡萄園は葡萄を実らすことよりも、枝を支へる方が忙がしいところである、真に美味な葡萄はそんな雑居的な棚になどはゐない。別なところにあつて民衆の口にとどくところにまで低く垂れ下つてゐるものである。問題にもしてゐないのに喧嘩を売る――という匿名子の批評に就いては、このことは諷刺作家が、諷刺敵の発見の方法に関係したことであるから、研究の余地がある。諷刺作家の諷刺敵を発見するといふ方面は、全く独特な方法にある。問題にされないことを、悲しんでゐる暇があつたら、その暇に諷刺作家は連続的なかたちで作品をつくつてゐれば良いのである。詩人レルモントフは、小説『現代の英雄』の中でかういつてゐる『自分は友人によりも敵に好意を示すだらう。何故なら、憎悪は只敵の寛量に順応してのみ強められるものであるから――』といつてゐる。このレルモントフの精神こそ、諷刺家の攻撃精神といふことができる、敵はしばしば寛量を示すものである。その途端にレルモントフのやうに、その寛量に甘へてはゐないで、一歩二歩と足を踏みこんで『順応して強められる』といふ憎悪をもつこと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多くの場合、相手が寛量を示すと、それに甘へるか、停滞して憎悪することを中止するか『順応して弱められる』かである。諷刺作家にとつて、自分の諷刺に対して、相手がこれを問題にしてくれないといふ態度は、悲しむどころか、むしろ敵の寛量として好意を謝していい、そしてそのために憎悪は却つて強められなければならないし、相手の黙殺を好機として、その相手に対して諷刺することが連続的でなければならない。
レルモントフは文学上の攻撃に関して『思想感情の交換は、吾々の間には不要です、残るのは一つの方法だけです、新しい出来事を語るだけです――』と言つてゐる。レルモントフの立場の明確さ、理屈や感情の取り交はしを否定してゐる。ここでいふ新しい出来事とは、作家、批評家の新しい創造的な事業といふ意味であるから、日本の文壇にとつては一層困難な事業となるだらう。
詩人レルモントフの描く作品の中には、非常に性格の強い人物が現はれてくる。このペチョリン的青年は、私にとつて一つの魅力である、作者レルモントフの積極性は『卑賤なものに対する強者の焦慮の声』と言はれてゐるが、ここでいふ卑賤なるものといふ言葉は、貴族が平民に向つていふやうな意味のそれではなく、その言葉は精神上の『卑屈なもの』といふ意味である。ここでいふ『強者』とは正統なるもの、正義的なるものの保持者、これが積極的な遂行者といふ意味である。強烈な正義観に燃えたレルモントフは、卑屈なものの存在することに我慢ができない、焦らだちをもつてゐた、そして作品の上で、これらの諷刺敵に向つて闘ひをいどんだのである。詩人プーシキンにもさうした『強者としての焦慮』を作品的にも、作家的動きにも発見できる。
レルモントフの場合の悪魔主義は、けつして当世流の絶望的厭世主義とはちがふ、それは人生のすべての卑賤なるものに対する好戦的な反抗の声であつた。作品に現はれた強者としての焦慮は、時には哀愁となり、或は喜悦となり、好戦的であると共に、時には底知れぬ敗北を歌ひだすといふ、立派な闘ふ人としての名優ぶりを示す、このタイプは、レルモントフにも、ヱセーニンにも、マヤコフスキイにも見出すことができるが、この一聯の好戦的な詩人達は、プーシキンとレルモントフとは決闘に依る死を、ヱセーニンとマヤコフスキイは自殺といふ悲劇的な運命をもつて、言ひ合したやうに結末をつけてゐるのである。
作品の上では強者の焦慮を歌ひ、諷刺的な好戦的な詩人も、運命的には不自然な死を選むこともあるといふことをこの四人の優れた諷刺詩人が立証したやうなものである。事実これらの詩人に例をとるまでもなく、むかしから優れた諷刺詩人は、決して反抗のための反抗者ではない。棍棒のやうに太い無神経な方法では、諷刺はできない、これらの優れた諷刺家は強い一面には、女性的であるとさへ思はれるほどの繊弱な感情のもち主である場合も少くない。ハイネや、シルレルを例にひくまでもなく、これらの詩人は何れも宿命論との良き闘ひ手ではあつたが、本人達は人間の運命といふものに対して、従順な人々が大部分であることも興味がある。
レルモントフはその詩人的激情性から、度々決闘をしたが、彼は何時の決闘のときでも相手をねらふことをしないで、空を撃つたと言はれてゐる。そして作品の上の決闘の場ではどうであるか、撃ちそこなつて、足を傷つけただけでも、背後の谷底に墜ちこむやうに、自分も相手も崖際に立つて勝負を決し、決定的な生死を賭ける方法を選んでゐる。そして作品の上では、何時も敵を惨忍に谷の中に射落してゐる、現実のレルモントフの決闘は、相手に対して殺意を持たずに空を射ち、作品に書く決闘では、完全に敵を斃してゐるといふ矛盾は作家の心理の復[#「復」に「ママ」の注記]雑さを語るものであらう。
『寛量』と名づけられるものを、少しもゆるさないといふ態度は、諷刺作家といふ意味だけに止まらず、作家の態度として立派なものだと思はれる、論争といふものを『友情ある闘争』と呼んだ政治家があるが、この人は『友情ある闘争のための地盤が未だ存在する間だけ、吾々は論争する――』と言つてゐる、更に言葉をつづけ『そして若しもこの地盤が失くなつたら、即ち相手が公然と観念論者たることを自白したことだ――』と附け加へてゐる。自分が論争を求めまた論争をする余地を認めてゐるのに拘はらず、相手がそれを避けてしまふといふ場合がある。その論争をする地盤がなくなつたときは、相手が公然と観念論者となつたものだといふ、我々の生活上でも、この種の場合が甚だ多い、私的な或は公的な場合にも、事なかれ主義を選む、観念主義者が少くない、殊に学問や、芸術の進展の過程には、論争を避けるといふことは不可能であるのに、議論を非友情的なものとして、論旨の発展の方法の協同性などといふものを認めない人々も少くない。
諷刺作家は、相手がそれに答へる、答へないに拘はらず、諷刺する地盤を自分で作りあげることのできる間は一人前である。敵が黙殺することは、敵の寛量として、これに順応して、より諷刺は強められなければならない。プーシキンやレルモントフの作家生活は、さうした不断な諷刺的追求の一生であつた、問題にする、問題にして貰ふといふ考へ方に執着してゐることは文壇至上主義者の態度である。
この種の批評家や匿名子は、言はば他人の論争の分け前を貰つて生活してゐるものである。かかる卑屈な乞食根性を排す、諷刺家は誰からも分前をもらつてゐないといふ意味で気軽な猟が出来るのである。もし諷刺作家の諷刺を少しも問題にせず、何等答へないといふことが、仮に永久的であつたとすれば、諷刺家にとつては、こんな有り難い都合の良いことはない、さういふことには関係なく、諷刺家はせつせとただ誠実な態度で、諷刺の手を止めなければ良いのである。諷刺とは何等特別な道徳から出発した一つの方法ではない。作家が理解するところの正統な世界を、現出するのに、都合の良い方法を、単に『諷刺』といふ方法に求めただけの話である。諷刺は悪口ではない、しかし世間的には悪口と解されてゐる。他人の悪口を言つて、それで木戸御免であれば、良いお株であり、いい顔だと思ふ、もし論争が起きたとすれば一層諷刺家は恵まれたことになる。さうした場合は諷刺的才能を極度に発揮する良い機縁を得たものとして、その論争を粗末に取扱はないやうにする、そしてそこで諷刺の腕を磨くのである。
風俗時評に望む<풍속시평에 바란다> 1939年
小熊秀雄(오쿠마 히데오)
いまでこそ風俗といふ言葉のもつてゐる内容も広くなつたが、昔は風俗と言へば、その時代の「服装文化」のことが主であつた。しかも昔のその服装、風俗なるものも、風俗の変化の動機も至つて単純素朴なものであつて、昔の諺にも「流行(はや)りの袢天を着ないものは馬鹿だ!」といつた。時代の流行に自然に添つてゆくことの賢明さを言つたものだらう。何も殊更に時の流行に逆行してゆくほどのこともあるまいといふ、当時の人間の考へ方の中には、ある温和な考へ方も混つてゐる。しかし現代の我々の眼に触れる服装文化の中には、単純に服装のこと――、とだけは考へられないものが多く、風俗の現れ方も昔のやうに素直でない。明らかに反政治的な服装、風俗、習慣といふものも発見できる。
지금이야말로 風俗이라 하는 언어가 갖고 있는 내용도 폭이 넓어졌으나 옛날에는 風俗이라 하면 그 시대의 <服裝文化>가 主였다.게다가 옛날의 그 服裝,風俗인것도 풍속의 변화의 동기도 이르러서 단순소박한 것이었으며 옛날 속담에도 <유행의 작업복을 입지 않는것은 바보다!>라고 하였다.시대의 유행에 자연적으로 따라 가는것의 현명함을 말한 것일것이라.무엇보다도 특히 당시의 유행에 역행해 갈정도의 일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며 당시의 인간 사고방식중에는 어떤 온화한 사고방식도 섞여 있다.그러나 현대의 우리들의 눈에 접하는 복장문화의 속에는 단순히 복장 문제___라고만은 생각되어지지 않는것이 많으며 풍속의 출현도 옛날처럼 솔직하지 않다.분명히 反政治적인 복장, 풍속,습관이라고 하는 것도 발견 할 수가 있다.
民衆といふものは、時代精神を何等かの形で表現し、意志表示をしなければ気が済まないものである。何物にでも仮託しても言ひ現はす。どのやうに手を替へ、品を替へても、正統だと思へばその生活欲望を果しをはせるものである。政治上に不満があつてもその不満を服飾上に消化してしまつて気がすむなどといふことは、ちよつと考へられさうもない。しかし事実は立派になされてゐる場合が多い。最近の婦人の服装の原色的で生々しいことは驚ろくべきほどで、これは時代精神の矯激性の現はれだと解していい。もし平時に、ああした色彩の濃厚な、大柄の服装をしてゐたら一口で「華美だ」と評されてしまふだらう。しかし現在では誰も華美だとは言はない。一方に戦争といふ現実が並行的であるために、服装上の矯激性もまだまだ不足のやうに思はれる。街頭にどのやうに突拍子もない色彩や、縞柄や、言動が飛びだしても、到底戦争の激しさには較ぶべくもないから、人々はさうした最高の感情を暗黙の間に目標として、街頭に於いてもその激しさを競ふやうになるだらう。
민중이라고 하는 것은 시대정신을 어떠한 형태로던 표현하며 의지표시를 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것이다.어떤것에라도 假託해서 표현한다.어떻게 손을 바꾸고 물건을 바꾸어도 正統이라고 생각하면 그 생활욕망을 완수할것을 생각하는 것이다.정치상으로 불만이 있어도 그 불만을 服飾上에 소화해 버리고는 만족한다고 하는 것은 조금은 생각되어지지 않는다.그러나 사실은 훌륭하게 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최근의 부인의 복장이 原色적으로 생생한것은 놀라울 정도이며 이것은 시대정신의 과격성의 출현이라고 해석해도 좋다.만일 平時에 저러한 색채의 농후하고 큼지막한 복장을 하고 있다면 한마디로 <화려하다!>라고 평판 되버릴 것이리라.그러나 현재에는 누구도 화려하다 라고는 말하지 않는다.한편으로 전쟁이라고 하는 현실이 병행적이기 때문에 복장상의 과격성도 아직은 부족한 것처럼 생각 된다.街頭에 어떻게든 도가 지나치지 않는 색채나 줄무늬 양식이나 언동이 튀어 나와도 도저히 전쟁의 격함에는 비교될 수도 없기에 사람들은 저러한 최고의 감정을 暗黙의 사이에 목표로 하여 街頭에 있어서도 그 격함을 경쟁하는것처럼 될것이다.
個人の服飾品や、室内の一備品にも、それがその人の選択に依るものといふ場合は、選択は立派な一種の批判である――。政治と婦人の髪飾りとの関係は、そのつながりの遠いにかかはらず、最も接近した関係に立つ。政治とは国家の機構を運用するといふ大掛りな仕事ばかりではなく、直接婦人の肌にも接触してゐるといふことができる。風俗時評家は、婦人の肌着から論じ起して、政治の核心に触れるか、或ひは政治から説き起して風俗的現象にふれてゆくか、その出発は何れにせよ、論旨を一般庶民の日常性にをいて、それを離れないといふことを風俗時評の特長としなければならない。
개인의 服飾品이나 실내의 한 備品에도 그것이 그 사람의 선택에 의한것이라고 하는 경우는 선택은 훌륭한 일종의 비판이다___.정치와 부인의 머리장식과의 관계는 그 연결이 멈에도 불구하고 가장 접근한 관계에 선다.정지라는 것은 국가의 기구를 운용한다고 하는 대규묘적인 일만은 아니며 직접 부인의 피부에도 접촉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風俗時評家는 부인의 속옷에서 논쟁을 일으키고 정치의 핵심에 접하든가 혹은 정치에서 말을 끄집어 내어 풍속적 현상에 접해 가던가 그 출발은 아무래도 좋으며 論旨를 일반서민의 일상성에 있어서 그것을 벗어날수가 없다고 하는 것을 風俗時評의 장점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物価統制は商品文化に対する戦時的制約ともみることができるが、さて政治家は価格の制約はできるとしても、商品を選ぶといふ個人の嗜好の自由までも制約することはできない。ところで第三流の政治家は、往々にして個人の嗜好や選択の自由にさへ統制、制約を加へようとして、十六七歳の娘つ子の身の廻りのことに就いても神経をつかひたがる。この場合の政治家は、娘達にとつては単なるうるさい年寄り[#「うるさい年寄り」に傍点]にすぎない。パーマネントと称する世にも妖しい髪型は、その流行の始めには、憎悪の的となつた。年輩者にとつては、「何かしら気に喰はなかつた――」のである。美容院の電気的操作の不備が槍玉にあがつて取締られたが、これは間接的にはパーマネントそのものに対する嫌悪の現はれとみていいだらう。しかし現在はどうだらう。この種の髪型は盛んなものである。若い娘達は頑張り通したのである。この髪型が果して美的であるかどうかの論議は別として、パーマネントの実用性の前には、パーマネント嫌悪者達が敗北したのである。
물가통제는 상품문화에 대한 戰時적 제약이라고도 볼수가 있지만 자!정치가는 가격의 제약은 할 수가 있어도 상품을 선택한다고 하는 개인의 嗜好의 자유까지 제약할수는 없다.헌데 第三流의 정치가는 往往 개인의 嗜好나 선택의 자유에 조차 통제,제약을 가하려 하여 십육칠세의 아가씨의 몸 주변에 있어서도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다.이러한 경우의 정치가는 아가씨들에 있어서는 단순한 성가신 연장자에 지나지 않는다.Permanent라고 칭하는 세간에서도 요사스러운 머리형태는 그 유행의 시작에는 증오의 표적이 되었다.연장자에 있어서는 <어쨋거나 맘에 들지 않았다__>인것이다.미용실의 電氣적 조작의 不備가 공격의 대상이 되어 감시되었지만 이것은 간접적으로는 Permanent 그것에 대한 혐오의 표현이라고 보아도 좋을것이다.그러나 현재는 어떠한가?이러한 종류의 머리 형태는 성황을 이루고 있다.젊은 아가씨들은 기를 쓰고 하는것이다.이 머리형태가 과연 美的인지 어떤지의 論議는 별도로 하고 Permanent의 실용성의 앞에는 Permanent 혐오자들이 패배한 것이다.
世間には娘達が唇の色を赤く塗りすぎると憤慨してゐる人もある。しかしこの憤慨してゐる人達の母親或ひは祖母達の中には、白い歯をオハグロと称するもので真黒に染めあげて、それで美しいと考へこんでゐた時代もあつたのである。風俗への批判を、個人的な好悪感に持つて行つては、醜悪な文章より書くことができない。さうした好き嫌ひといふ個人的文章、一種の私憤的な風俗時評がまことに多いのである。私憤をもつては時代の風俗は論じられない。しかし庶民生活の些細な一現象も、それをとりあげて綿密に論じてくれば、充分にその時代の政治的理由と結びつく。風俗時評家が最も公平な立場に立たうとすれば、風俗を単なる風俗といふやうに抽象的に切り離しては考へないことである。「風俗」といひ、また「流行」といふことは、昔のやうに素朴な抽象的現実としてはとどまつてゐない。近代の流行なるものも、歴史的時間系列の中で、生きもののやうに本能的にさへ変化してゆく。風俗、流行は、社会に触れ、道徳に触れ、政治に触れて、すぎ去る通り魔のやうなものである。帽子のかぶり方の、ちよつとした傾け方にも、その人間がもつてゐる、他人にか社会にか、何かにむかつての侮蔑感がよく現はれてゐることもある。さうした些細な現象もまた現象であると同時に、充分に本質を語るものである。さりげなく通りすぎるものを、取りあげて論じてゆくところに、案外に大きな社会的意義がひそむ。風俗時評家は、民衆の生きて動いてゐる世界を知らなければならない。いかにも退屈さうに、のろのろと街を流れてゐるのが民衆の真の姿ではないだらう。むしろその逆の手に負へない我儘者としての民衆の生活感情もあるといふことは見遁すことができない。
세간에는 아가씨들이 입술 색을 빨갛게 지나칠 정도로 칠하고 있다고 분개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그러나 이 분개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친 혹은 할머님들 중에는 하얀 이를 齒黑이라고 칭하는 것으로 새까맣게 물들이고 그것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던 시대도 있었던 것이다.풍속에의 비판을 개인적인 好惡感으로 가지고 가서는 추악한 문장밖에 쓸수가 없다. 私憤을 가지고는 시대의 풍속은 논할 수가 없다.그러나 서민생활의 자세한 한 현상도 그것을 들어서 면밀하게 논해 가면 충분히 그 시대의 정치적 이유로 연결 된다. 風俗時評家가 가장 공평한 입장에 서려고 하면 풍속을 단순한 풍속이라고 하는 것처럼 추상적으로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가 없는것이다.<風俗>이라 하고 또 <流行>이라 하는것은 엤날처럼 소박한 추상적 현실로서는 안주하지 않는다.근대의 유행인것도 역사적 시간계열 속에서 살아있는 것처럼 본능적에 조차 변화해 간다.풍속,유행은 사회에 접하고 도덕에 접하고 정치에 접하여 사라져 가는 그대로의 魔와 같은 것이다.모자를 쓰는 방식에서 조금은 비스듬히 하는 방식에도 그 인간이 가지고 있는 타인이나 사회에 무언가에 향한 모멸감이 잘 나타나 있는 것도 있다.저러한 자세한 현상도 또 현상인 동시에 충분히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아무일 없이 지나치는 것을 문제삼아서 논하여 가는 것에 의외로 커다란 사회적 의의가 숨어 있다. 風俗時評家는 민중의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세계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어지간히도 지루한듯이 어기적 어기적 거리를 흘러가고 있는것이 민중의 참 모습은 아닐 것이다.오히려 그 반대공격에 질수 없는 인내자로서의 민중의 생활감정도 있다고 하는 것은 간과할 수가 없다.
鶏卵の価格統制をすると、卵が途中下車して東京にやつてこない。支那ではもつと徹底してゐる。新聞でみると、軍隊が部落を占領すると部落には一羽の鶏の姿もみえない。ところが鶏が居ないのに、支那人は籠にどつさり玉子を盛つて日本軍に売りに来るから不思議だといふことであつた。卵を産む生きた機械――、これを支那人たちは巧みにどこかに隠してをいてゐるにちがひないのである。民衆の意志といふものは、日本人も支那人もそのデリケートさに於いては、そんなに開きがあるものではない。民衆と為政者との関係に現はれた「風俗的なもの」は、日本の卵が貨車から飛び下りたり、支那では鶏が居ないのに卵を産みださせるやうに、なにかしらのらくらと消極的な形式に於いても、民衆の正統な意志といふものを表現する場合が甚だ多いのである。
께란의 가격통제를 한다면 달걀이 도중하차하여 동경에 오지 않는다.支那에서는 더욱 철저하다.신문에서 보면 군대가 부락을 점령하면 부락에는 한 마리의 닭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헌데 닭이 없는데도 支那인은 닭장에 수북히 알을 담아서 일본군에 팔러 오기에 이상하다고 하는 것이었다.계란을 낳는 살아 있는 機械___이것을 支那인들은 교묘하게 어딘가에 숨기고 있음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민중의 으의지라고 하는 것은 일본인도 支那인도 그 delicate함에 있어서는 그렇게 개방이 있는것이 아니다.민중과 위정자와의 관계에 나타난 <풍속적인것>은 일본의 달걀이 화차에서 내려지거나 支那에서는 닭이 없는데도 알을 낳을수가 있는 것처럼 뭔지 몰라도 게을르게 소극적인 형식에 있어서도 민중의 정통적인 의지라고 하는 것을 표현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것이다.
新聞雑誌に現はれた風俗時評が案外面白くないのは、現象肯定的なものが多いからである。かりに「銀座」を幾千回散歩しても、銀座の風俗時評は書けないのである。さりとて銀座裏を知ることが銀座を知ることにもならない。殊に銀座マニヤは最も銀座を知らないことになる。銀座の風俗を知るといふ、客観者になるといふことは、それでは非常に難かしい仕事だらうか、それは難かしいこととは思はない。ただどんな単純な風俗や習慣でも、それを単純に見のがさないといふ理由だけで、風俗批評の第一の立場を獲得することができるだらう。
신문잡지에 나타난 風俗時評이 의외로 재미 없는것은 현상긍적적인 것이 많기 때문이다.설사 <銀座>를 수천번 산책하여도 銀座의 風俗時評은 쓸수가 없는것이다.그렇다고 銀座 뒷골목을 아는 것이 銀座를 아는것도 되지 않는다.특히 銀座mania는 가장 銀座를 알지 못하게 된다.銀座의 풍속을 안다고 하는 객관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일까? 그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어떤 단순한 풍속이나 관습에도 그것을 단순히 놓치지 않는다고 하는 이유만으로 風俗時評의 第一의 입장을 획득할 수가 있을 것이다.
それほどに風俗の変化といふものは、案外に緩漫なものである。現象ではなく、現象に裏打ちされたものは、往々にして見のがしやすいものである。時代の風俗が為政者の眼に余るやうになつたときは、すでに風俗批評家の批評の手に余るときであらう。為政者がとかくの制肘をそれに加へても、既に遅いだらう。何故なら、眼に余るやうな風俗とは、民衆の強烈な意志表示の一種であるし、民衆的な痙攣の始まりであるからである。さうした場合は悪い風邪の場合のやうに、熱をさます、鎮静させる以外に応急の手段はない。却つてそれを押へることによつて痙攣が昂まるのである。新聞雑誌の風俗時評の中には、その批判態度に、強い個人的な倫理観を加へてゐるものもあるが、一つの風俗現象に対してそれが良いことだとか、悪いことだとか、それに道徳的基準を性急に当てはめるといふことは余程考へものである。またそれでは風俗時評の面白味が半減する。またさうした種類の道徳家の批評の手には、風俗時評なるものは手に負へるものではない。風俗時評は、道徳的基準を当てはめる前に、その事実をまづ肯定してから、読者の批判の只中に、その事実をもちだすといふことにある。
그정도로 풍속의 변화라고 하는 것은 의외로 완만한 것이다.현상에서가 아니라 현상에 뒷받침 되는 것은 往往 놓치기 쉬운것이다.시대의 풍속이 위정자의 눈에 남아 돌것처럼 되었을 때는 이미 風俗批評家의 비평의 손에 남아 돌듯한 때일것이리라.위정자가 모처럼의 제한을 그것에 가해도 이미 늦을 것이다. 왜냐하면 눈에 남아도는 듯한 풍속이란 것은 민중의 강렬한 의지표시의 일종이며 민중적인 경련의 시작이기 때문이다.그러한 경우는 지독한 감기의 경우처럼 열을 식히고 진정시키는 이외는 응급의 수단은 없다.오히려 그것을 억누려 함에 의해서 경련이 높아지는 것이다.신문잡지의 風俗時評중에는 그 비판태도에 강한 개인적인 윤리관을 가하고 있는것도 있지만 하나의 풍속현상에 대하여 그것이 좋다던가 나쁘다던가 그것에 도덕적 기준을 성급하게 끼워 맞춘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생각할 수가 있는것이다.또 그래서는 풍속시평의 재미가 반감한다.또 그러한 종류의 도덕가의 비평의 손에는 風俗時評인것은 손에 업을수가 있는것이 아니다.風俗時評은 도덕적 기준을 맞추기전에 그 사실을 먼저 긍정하고 나서 독자의 비판의 只中에 그 사실을 끌어 낸다고 하는 것에 있다.
社会現象に対して白眼視的な、また嘲笑家的な立場からは、風俗時評は扱ひ易いやうに思へるが、事実はさうではない。もつと公平な素朴な白紙状態に於いて、社会現象をみるといふことと、さうした現象の起きた遠因を求めてゆくといふ熱心さがほしい。風俗時評は風俗時評などといふジャンルを決めてしまはずに、あらゆる場所で盛んに風俗の問題は扱はれていい。文章といふものは、風俗などといふ柔らかいものより、政治的な固いものを扱ふことが優位的なものだといふ考へ方は偏見である。新聞社説がその見地から脱けることができず、政治的論評ばかり続けて行詰りを言はれてゐるのも、そこらに理由がある。時代の流行や風俗的なものの、本質を論じて行くには、これらの政治性を論じてゆくことで論説記者のその目的を果せる筈である。
사회현상에 대하여 백안시적인 또 嘲笑家적인 입장에서는 풍속시평은 다루기 쉬운것처럼 생각할 수가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더욱 공평하고 소박한 백지상태에 있어서 사회현상을 본다고 하는 것과 그러한 현상이 일어난 원인을 찾아 간다고 하는 열심히 있었으면 한다.風俗時評은 風俗時評이라고 하는 장르를 결정해 버리지 않고 모든 장소에서 성황리에 풍속문제는 취급되어도 좋다.문장이라고 하는 것은 풍속 등이라고 하는 부드러운 것보다 정치적인 딱딱한 것을 취급하는 것이 우위적인 것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편견이다.신문사설이 그 견지에서 벗어 날수가 없고 정치적 평론만 계속해서 궁지에 몰려 말해지고 있는것도 그곳에 이유가 있다.시대의 유행이나 풍속적인 것이 본질을 논하여 가려면 이러한 정치성을 논해 가는 것으로 논설기자의 그 목적을 다하여야 할것이다.
また一般読者もさうした柔らかい風俗批判の新聞社説を興味をもつて読むだらう。だが風俗と政治とを結びつける仕事の難かしさはたしかにある。政治の反映するところは単純な現ればかりではない。政治が幾屈折もして、そこに思ひがけない遠いところに、風俗への反映がある。風俗時評の面白味は、さうした一見何の変哲もないやうな事実の中から、大きな社会的問題を引きだしてゆくといふところにあるだろう。同時に問題をいつも庶民的位置に据ゑて、そこから論じてゆくといふことが、風俗時評の特質であらう。
또 일반독자도 그러한 부드러운 풍속비판의 신문사설을 흥미를 갖고 읽어야 할것이다. 허지만 풍속과 정치와를 연결 짓는 일의 어려움은 분명히 있다.정치가 반영하는 곳은 단순한 출현만은 아니다.정치가 몇 굴절이라도 하여 그곳에 생각도 못한 먼 곳에 풍속에의 반영이 있다.풍속시평의 재미는 그러한 一見 어떤 變哲도 없는듯한 사실속에서 커다란 사회적 문제를 끌어 내어 간다고 하는 곳에 있을것이다. 동시에 문제를 항상 서민적 위치에 놓고서 거기에서 논하여 간다고 하는 것이 風俗時評의 特質일 것이다.
煙草難
小熊秀雄(오쿠마 히데오) 一九三九年
煙草を論ずるに先だつて、筆者がどういふ種類の煙草をすつてゐるかといふことを、まづもつて述べなければいけない。何故なら、煙草はその吸ふ人の選み方によつて、その人の社会的境遇といふものを、まことによく説明してゐるからだ。敷島や朝日を会社で吸つてゐて馘になつた平社員があるさうだ。彼は分に応じた煙草を選んで吸はないで、俗に重役煙草と言はれてゐる、敷島や朝日を吸つてゐたためだ。彼が平社員らしくバットを吸つてゐた限りでは無事であつたのに、彼は煙草の階級別といふ、デリケートな段階があることを無視したばかりに、さういふことになつたのである。
筆者はバット党である。いやバット以外にいろいろの煙草が存在することなどは、ただの一度も考へてみたことがない。煙草饑饉にぶつかつても、それは筆者にとつては、バット饑饉といふ理由だけにとどまる。煙草屋の硝子のケースに、朝日や、敷島や、暁や、其他の煙草が残つてゐても、嬉しくないばかりか、手もでないのである。バットのかはりに他の種類の煙草を代用するといふことが、どうしても出来ないやうな人々にとつて、始めて煙草饑饉といふ、饑饉の意味の、社会的意味がはつきりしてくる。
煙草が饑饉だとはいつても、まだ葉巻が売切れたといふ話は聞いたことがないので、高級なものを選んでゆくといふことでは、口から煙などは絶やすことなどはあるまいと思ふ。バットといふ、平社員、一般庶民の煙草の品切れといふことは、その煙草が大多数の国民の嗜好品であるといふ意味で、問題が残るのである。売行きの少ない、つまり少数の国民を代表したやうな、煙草などは、いくら売切れになつたところで、バット党にとつては何の関係もない。それに筆者の経験では、バット党は、バットが品切れになっても、次の配給がやつてくるまで、じつと辛抱してゐて、他の煙草を吸はないといふ、バット党独特の忍耐力もあるのである。その点他の煙草を吸ふ人は、チェ[#「ェ」は底本では「ヱ」の小文字]リーがなければ、暁とか、朝日とか、どれにでも移つてゆくといふ。煙草嗜好上の節操がないこと、をびただしい。バット党に言はせれば、これらの無節操派の煙草のみは軽蔑に値するので、大体に最近の民衆の舌や唇は敏感になつてゐる筈なのに、甲の煙草がなければ、すぐ乙の煙草を吸ふといふ態度は、よほど舌や唇が鈍感な手合だと思はれるのである。
バットの日本史的意義如何――などといつたら、大げさなことを言ふなと笑ふ人もあるだらうが、バットの欠乏や、配給不潤沢の現象は、日本史的意義どころか、世界史的意義をもつであらう。かういふ例がある。ナポレオンの大陸政策によつて生じた二つの生産物の欠乏、『砂糖と珈琲』の欠乏が、ドイツ人を駆つてナポレオンに対して反逆するに到らしめ、それが一八一三年の独立戦争の口火になり、土台になつたといふことだ。これがほんとうだとすれば、砂糖と珈琲の欠乏も、また世界史的意義があるわけだ。
我国の大陸政策によつて、煙草饑饉が招来したなどといふ考へ方は、筆者は毛頭もつてゐない。したがつてさういふ意味の煙草饑饉の世界史的意義の考へ方は、経済学者の方にまかしてをかう。筆者のいふ意味の世界史的意義は、あくまでバット中心論なのである。バットを中心として、日本史的、世界史的意義を論ずるといふ、立場を固持したいのである。
事実『煙草難』といひ、『煙草饑饉』といはれてゐるが、これをバットを中心として考へてみるときは、ただ煙草がないといつた全体的な言ひ方、大局的な言ひ方だけでは煙草欠乏の根本問題に触れることができない。それは読者諸君が試みに、煙草屋の娘にきいてみてもいゝし、専売局にきいてみてもわかる。バットの配給は数の上では、以前よりも決して少くないばかりか、多い位なのである。それだのに、バットが売切れるといふことは、どうした理由だらう。こゝへ来てバット党が殖へたのであらうか。それに違ひないのである。しかしその現象は、バット以外の品不足が、これらの人々をバットを吸ふといふことに帰着させただけである。
バットを平民煙草、卑俗煙草として、お口に合はなかつた人も、こゝへ来てはバットを吸はなければならなくなつたといふ、観念上の理由と、もう一つ経済上の理由とが、曾つて無節操派が、最後の無節操ぶりを、バットを吸ふということに依つて求めざるを得なくなつただけである。
一口で言へば、朝日、暁、ひかり、等々の煙草愛好者の、バットへの転落を意味してゐる。嗜好の転落も、それがプーと吸ってフッと煙として吐きだす、甚だ消費的なものであるにしても、それが必需品であるといふ意味で『嗜好の転落』もまた、大きな社会的、経済的意味を含んでゐるといふべきだらう。ひいては日本史的、世界史的意義があると、大きく論ずることもできさうだ。
ゴールデン・バットの箱の表紙に刷られた二匹の金蝙蝠を、喫茶店で有閑学生が『君、この二匹の蝙蝠のうち、どっちが雄で、どつちが雌か知つてゐるか――』などと論じてゐるうちに、金の蝙蝠がいつのまにか、茶色に変つてしまひ、指先に触感の快よかつた銀の包紙もどこかにいつてしまひ、箱を小型にするために邪慳に、口は箱の外に追ひだされた。僅かの期間の間に、バット位敏感に社会状勢の反映した種類の煙草は他にあるまい。
しかしこのバット饑饉も、考へようで甚だ楽観的な考察をそれに下すことができる。
いまの所、我国にはバットより安価な煙草はない。しかも値段の割に、いちばん美味い煙草といふ原則を崩すわけにはいかない理由がある。それは何もバット党が、政府や、専売局の弱味を握つてゐるわけでもなんでもない。物資調整の折柄だから、値段をあげて、品質を落すといふことも可能なわけだ。しかし箱を小型にし、銀紙を廃しても、品質を落さないところに、バットといふ大多数の嗜好品に対しての、政府当局の正統な理解がある。しかも最近ではバットの品切れなどはなくなつたし、今後はさういふことが少くなるだらう。外国新聞に誤つて『日本に煙草饑饉がやってきたさうだ』などとデマられることは、外交政策上不利であるから、さういふデマは極力避ける必要からも、バットを切らすことは今後はあるまい。箱の表の蝙蝠の絵をながめながら、有閑学生が『茶色の蝙蝠をゴールデン・バットとはこれ如何――』などと謎々をやるだらうが、金色を廃して、茶色で刷つてゐるとはいひながら、一寸見には、この蝙蝠は『金色』に見えるのである。しかし茶色を金に見せるなどとは我国の印刷術が如何に優秀にして発達してゐるかといふことにもなる。
담배를 論함에 앞서서 筆者가 어떠한 종류의 담배를 피고 있는가 하는것을 우선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왜냐하면 담배는 그 피는 사람의 선택에 의해서 그 사람의 사회적 境遇라 하는 것을 진실로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敷島(시끼시마)나朝日(아사히)를 회사에서 피워서 잘리게 된 平社員이 있다고 한다.그는 분수에 맞는 담배를 선택하여 피지 않고 속된 말로 重役담배라고 불려지고 있는 敷島나朝日를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다.그가 平社員답게 Bat를 피우고 있는 한에서는 무사했는데 그는 담배의 階級別이라고 하는 delicate한 계급이 있는것을 무시 했을뿐인데 저렇게 되었던 것이다.
筆者는 Bat黨이다. 아니!Bat이외에 여러가지 담배가 존재한다고 하는 따위는 단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담배 饑饉에 닥쳐도 그것은 筆者에 있어서는 Bat饑饉이라 하는 이유정도로 머문다. 담배집의 유리 case에 朝日나 敷島나 曉(아까쯔끼)나 기타의 담배가 남아 있어도 기쁘지 않을뿐더러 손도 대지 않는것이다.Bat 대신에 다른 종류의 담배를 代用한다고 하는 것이 도저히 할수 없는듯한 사람들에 있어서 비로서 담배 饑饉이라 하는 饑饉의 의미인 사회적 의미가 확실하게 온다.
담배가 饑饉이라고는 말해도 아직 엽궐련이 품절되었다고 하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서 高級 물건을 선택해 간다고 하는 점에서는 입에서 연기등은 끊는 일따위는 없다고 생각한다.Bat라고 하여 平社員, 일반서민의 담배의 品切이라고 하는 것은 그 담배가 대다수의 국민의 기호품이라고 하는 의미로 문제가 남아 있는것이다.매상이 적은 즉 少數의 국민을 대표하는듯한 담배등은 아무리 다 팔렸다고 한다해도 Bat黨에 있어서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게다가 筆者의 경험에서는 Bat黨은 Bat가 品切이 되어도 다음 배급이 나올때 까지 가만히 참고 있으면서 다른 담배를 피지 않는다고 하는 Bat黨 獨特의 인내력도 있는것이다.그점에서 다른 담배를 피는 사람은 Cherry가 없으면 曉라던가 朝日라던가 어느것이라도 옮겨 간다고 한다.담배 嗜好上의 節操이 없는것이 심하다.Bat黨의 말로는 이러한 無節操派의 담배만은 경멸할 가치가 있는것으로 대체로 최근의 민중의 혀나 입술은 민감하게 되고 있어야 당연한데 甲의 담배가 없으면 바로 乙의 담배를 피운다고 하는 태도는 상당히 혀나 입술이 鈍感한 무리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Bat의 日本史的意義如何____라고 하면 과장된 말을 하는군 하면서 웃는 사람도 있을터이지만 Bat의 결핍이나 배급不潤澤의 현상은 日本史的意義는 물론이고 世界史的意義를 갖고 있을것이다.이러한 例가 있다.Napoleon의 大陸政策에 의해서 생긴 두가지 생산물의 결핍<사탕과 커피>의 결핍이 獨逸人을 쫒아 Napoleon에 對하여 反逆함에 이르렀으며 그것이 1813年의 獨立戰爭의 불씨가 되고 土台가 되었다고 하는것이다.이것이 정말이라고 한다면 사탕과 커피의 결핍도 또 世界史的意義가 있는 이치이다.
我國의 大陸政策에 의하여 담배 饑饉이 초래 했다고 하는 사고방식은 筆者는 조금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저러한 의미의 담배 饑饉의 世界史的意義의 사고방식은 經濟學者 쪽에 맡겨 두자!筆者가 말하는 의미의 世界史的意義는 어디까지나 Bat 中心論인 것이다. Bat를 중심으로 하여 日本史的,世界史的意義를 論한다고 하는 입장을 固持하고 싶은것이다.
사실 <담배難>이라고 하고<담배 饑饉>이라 말해지고 있지만 이것을 Bat 를 중심으로서 생각해 볼 때는 그저 담배가 없다라고 하는 全體的인 말투,大局的인 말투만으로는 담배 결핍의 根本문제에 접할수가 없는 것이다.이것은 讀者諸君이 시험삼아 담배집 아가씨에게 물어 봐도 좋으며 專賣局에 물어 봐도 안다.Bat의 배급은 數상으로는 이전보다도 결코 적지 않을뿐더러 많은 정도인것이다.그런데도 Bat가 다 팔렸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곳에 와서 Bat黨이 심어 논걸까?그것이 틀림 없는것이다.그러나 그 현상은 Bat이외의 물건 부족이 이러한 사람들을 Bat를 핀다고 하는 것에 歸着시켰을 뿐이다.
Bat를 평민 담배,卑俗 담배로서 입에 대지 않았던 사람도 이곳에 와서는 Bat를 피우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고 하는 觀念上의 이유와 또 한가지 경제상의 이유가 오히려 無節操派가 최후의 無節操티를 Bat를 피운다고 함에 의하여 구하지 않을수가 없게 되었을 뿐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朝日,曉,히까리 등등의 담배 愛好者의 Bat에의 轉落을 의미하고 있다.嗜好의 轉落도 그것이 후~하고 피우고 훅~하고 연기로서 내뱉는 甚히 消費的인것이다 하여도 그것이 필수품이라고 하는 의미로 <嗜好의 轉落>도 또 커다란 사회적,경제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야 할것이리라.나아가서는 日本史的,世界史的 意義가 있다고 크게 論하는 것도 될것 같다.
Golden Bat의 상자 表紙에 인쇄된 두마리 金박쥐를 다방에서 有閑學生이 <자네!이 두마리 박쥐 중 어느쪽이 암놈이고 어느쪽이 숫놈인지 알고 있는가?___>하면서 論하고 있는 중에 金박쥐가 어느샌가 茶色으로 변해 버려서 손끝에 감촉이 좋았던 銀포장지도 어디론가 가버리고 상자를 小型으로 하기 위해서 매몰차게 입은 상자 밖으로 내쫒겼다. 쪼매한 期間 사이에 Bat만큼 민감하게 사회상태를 반영한 종류의 담배는 달리 없다.
그러나 이 Bat 饑饉도 생각하면 甚히 樂觀的인 考察을 그것에 줄수가 있다.
지금으로서는 我國에는 Bat보다 값이 싼 담배는 없다.게다가 값에 비하여 가장 맛 있는 담배라고 하는 원칙을 무너뜨려서는 안되는 이유가 있다.그것은 무엇보다도 Bat黨이 정부나 專賣局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이유도 아무것도 아니다.物資調整의 시절이니만큼 값을 올리고 품질을 떨어트린다고 하는 것도 가능한 이유다.그러나 상자를 小型으로 하고 銀紙를 없애도 품질을 떨어트리지 않는 점에 Bat라고 하는 大多數의 嗜好品에 대한 정부당국의 正統적인 이해가 있다.게다가 최근에는 Bat의 品切등은 없어졌으며 今後는 저러한 것이 적어질것이다.外國新聞에 잘못으로<日本에 담배 饑饉이 다가 온듯하다!>하면서 流言飛語 되는 것은 外交政策上 불리하니까 저러한 Demagogie는 極力 피할 필요에서도 Bat를 자르는 것은 今後는 없다.상자 겉의 박쥐 그림을 바라보면서 잠시 보기에는 이 박쥐는 <金色>으로 보이는 것이다.그러나 茶色을 金으로 볼수가 있다고 함은 我國의 인쇄술이 얼마나 優秀하게 발달하고 있는가 하는것으로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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