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九四〇年
現代大衆文学批判
――ユーモア小説
後味の悪い笑ひ 뒷맛이 않좋은 웃음
ユーモア小説に就いては、私よりも一般読者諸者が 数多く読んでをられることと思ふ、そこで読者はどんな感想を得てをられるか、世上のユーモア小説なるものは読み下しが非常に良い、しかし読み終つてしまつてから、たいへん後味の悪いものを感ずるに相違ない、その後味の悪さといふものは、どういふことであるか、一般市民といふものは、ひとつの事実に対して、これはどういふことであるかと、頭が痛くなるほど熟考するといふことが、至つて少ない、内容的に全くゼロな娯楽小説本に対しても、また頭脳の負担の軽いものを求めて、読みつ放しそして忘却する。
유머소설에 관해서는 나보다도 일반독자제군들이 많이들 읽었다고는 생각하는데 독자는 어떤 감상을 얻는것일까? 세상의 유머소설이라 하는것은 주욱 흟어보는것은 좋으나 다 읽고나버린 뒤에 대단히 그 뒷맛이 나쁘다는것을 느낌은 틀림이 없는데 그 뒷맛이 좋지 않다는것은 어떤것일까? 일반시민이라 하는것은 하나의 사실에 대하여 이것은 어떤것인가? 머리가 아플만큼 숙고해본일이 대단히 적으며 내용적으로 전혀 제로상태인 오락소설에 대하여도,또 두뇌의 부담이 가벼운것을 추구한들 읽고나서 그리고 망각한다.
文学とか、文壇とか、いろいろの既定的な人情習慣の巣に住んでゐない、一般読者は、愚かしい小説を読みながらも全くその愚かしさに捉へられてしまふわけではない「何んだつまらん――」といふだけの最小限度の批判をもつてゐる、我々は先づ一般国民読者のこの最小限度の批判を唯一の頼りどころにする、一般読者に批判を喪失させるやうな文章を書くことを恥るのである。
문학이라던가,문단등 여러 가지의 한정적인 인정습관의 둥지에 살고 있지 않은 일반독자는 엉터리 같은 소설을 읽으면서도 전혀 그 엉터리에 사로잡히어 놀아나지만은 않고<뭐야 이건....>라고 할정도의 최소한도의 비판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들은 먼저 일반국민독자의 이러한 최소한도의 비판을 유일한 의지처로 하는 일반독자에 비판을 상실시키려 하는 문장을 씀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大衆文学全体に適てはめなければならない、作家の良心的な拠りどころは、実はそのところにあるのである。ユーモア作家自身の作品の素材といふことをのぞくとき、さうした大衆に接触する作家が、全く道徳的にも問題が非常に多いことを知るであらう、ユーモア小説の材料はいつたいどのやうな分布状態に於て取材されてゐるだらうか、銀ブラマン、カフェ[#「ェ」は底本では「ヱ」の小文字]ー女給、昔の恋人、デパートの売子、ダンサー、マネキン、喫茶娘などである。ユーモア作家は、而もその材料を超克して、新しい材料に組みつくといふ気力が全くない。「きみけふは忙がしい、お茶につきあつてくれない」といつたお定まりの会話をはさむことによつて、彼女と青年は銀ブラを行ふ、やがて銀座の裏へ入ることが定石なのである。ユーモア作家が材料的に、消費享楽方面を克服できないといふ理由の中には、この作家たちも、さうした生活圏以外の他の生活圏をもつてゐないといふことと、ものを考へるといふ自由のものにも新しいユーモア作品、もつと具体的に言へば、ユーモアな現実に、思惟の触手をのばすといふ気魄もないのである。
대중문학전체에 적합하게 손을 대지 않으면 안되는 작가의 양심적인 의지처는 실은 그곳에 있는 것이다. 유머작가 자신의 작품소재라고 하는것을 들여다 보면 그러한 대중에 접촉하는 작가가 전혀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대단히 많음을 알것이고,유머소설의 재료는 도대체 어떠한 분포상태에서 취재되고 있는것인가? 은 브라만,카페의 여급,옛날의 애인,백화점의 판매원,댄서,마네킹,찻집아가씨 등이다. 유머작가는 더더욱 그 재료를 초극하여 새로운 재료로 짜맞춘다는 기력이 전혀 없다,
佐々木邦氏や獅子文六氏のやうなユーモア作家はその素材は、他のナンセンス、ユーモア作家とは異つてゐるが、結局に於いて、作品の限界を、文学的にも政治的にもちやんと心得てゐるといふ意味で、ユーモア作家や諷刺作家にとつての、「不必要な限界」を楽しさうに弄んでゐるに止まるであらう。
佐々木邦氏나獅子文六氏와 같은 유모아작가는 그 재료는 다른 난센스,유모아작가와는 다르지만 결국에 있어서는 작품의 한계를 문학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짠~하고 마음으로 터득하고 있다는 의미로,유모아 작가나 풍자작가에 있어서의 <불필요한 한계>를 즐기는듯이 장난하고 있음에 그치는것일것이리라.
ドストイヱフスキイはその日記の中で「知識の間違ひ」と「感情の間違ひ」を区別して言つてゐる。現代のユーモア作家は、その材料が、全く知性的でもないし、啓発的でもないし、知識的でもないのである。従つて作品は何れも、分析的要素に欠けた、「感情的な間違ひだらけの作品」なのである。
ドフトイヱフスキイは言つてゐる。「知識の間違ひであれば、多く生きた実際生活の出来事の否認しがたき論法によつて、なすだけ、それだけ癒し易い――ところが感情の間違ひは恐ろしく大切なものである。これはもはや悪毒に染まつた精神であると――」現代のユーモア作家は、その書くものは知識的でなくて、感情の間違ひだらけであると言へるであらう。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일기속에서<지식의 그릇됨>과<감정의 그릇됨>을 구별해서 말하고 있다. 현대의 유모아 작가는 그 재료가 전혀 지성적이지도 않고 계발적이지도 않으며 지식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작품은 어느것이나 분석적요소가 결핍된 <감정적인 거짓투성이의 작품>인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하고 있다.<지식이 잘못되어 있으면,많은 기존의 실제생활의 일들을 부인하는 논법에 의하여 그런대로 그렇게 쉽게 치유가 된다_ 그러나 감정의 그릇됨은 아마도 대단히 의미심장한 문제이다. 이것은 이미 악독에 물이 든 정신이다..> 현대의 유모아 작가는 그 작품의 재료가 지식적인것이 아니고 감정의 거짓뿐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것이라.
愛読者の心理解剖
現在のユーモア小説類が、甚だくだらないものが多いといふことも、決して驚くべきことでも、ユーモア小説自身が不幸を嘆く性質のものでもない。私がこゝでユーモア文学を論ずることゝは別に、この種の作家は、批評家の言葉もまた読者そのものをも頭からのんでかゝつてゐる。内気な筆致などゝいふものはない、何れも図々しさで組み立てられた文章なのである。
しかしこれらの内容的に貧弱な大衆文学を、読者が愛読してゐるといふことが、決して一般読者が、ユーモア小説を読むほど愚かしいものだとは言へない、大学の角帽をかぶつた学生が、電車の中で、つまらぬ講談類の雑誌を読んでゐる。もつと何か他に読む本もありさうなものだと――思はず私はその大学生の顔をみる。しかしこの大学生が必ずさうしたクダラヌ読物をみてゐるからといつて、劣等生とは言ひきれない。何故なら、大衆文学全体に触れて、この種の文学の大衆を把へるところの特長は、劣等生にも、優等生にも悪市民にも、善良な市民にも、所謂すべての大衆の読書感情を収容するといふところにある。
しかしそれでは大学生が愚かしい大衆講談を読み、一般市民が出来の悪いユーモア小説を読むことを、全く肯定していゝだらうか、人生に時間といふものがないのであれば、全く放任の状態であつていゝ、しかしかうして私といふ批評家が、ユーモア文学の悪態をつ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ふことも、有限な時間の中での、ひとつの事業なのである。そのことは一般読者が個々に所有してゐる、時間を如何に使はれてゐるかといふことと関係してゐる。
私は最近始めて少女歌劇なるものを見た。そして非常に感心し、ある種の感動さへしたのである。我々が少年の頃ガラス板を三枚合せて、赤青の紙をその三角形の筒に入れて、覗いて楽しんだこの玩具の「万華鏡」とそつくりの舞台転換の美しさがこの少女レビュー、歌劇にあつた。最も通俗的な意味で色彩の豊富なやうに、舞台が仕組まれてあるし、めまぐるしさと華麗は究極点に達してゐたといふべきだらう。女の子が喜ぶのもむりがない。又娘に内緒で母親が凝つて通ふのも無理がないと思はれるものがある。しかし私の少女歌劇の感想は終つたわけではない。少女歌劇なるものゝ形式はわかつた。しかし残るところは、その内容なのである。私はこの種のものは「一度だけで沢山」なのである。しかし世の中にはそこに反復通ふ娘達も多いのである。
この事実に対して、これらの事実が実際に世の中にある――といふことを見遁さないやうにして、結論的なものを引き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一言でいへば少女歌劇や、現在のユーモア作品、或は血を流す講談、茶番的対話、四月馬鹿のやうに公然と嘘をつくこと、などの内容への吟味は、これは社会政策と関聯がある。それは無害であるに達ひない。この無害なものは有害でないといふ意味で放任されてをいてよいか、我々は愚劣な催し物、読み物に対して、精神の解放といふ意味から、ときにはそれを進んで読む興味がある。しかしそれを何度も反復した場合にどんな結果が生ずるかといふことを考へないわけにはいかない。私は現在のユーモア小説に対しては、少女レビューと同様「一度だけで沢山」なのである、しかしよしそれらのものが無害の内容をもつたとしても、ユーモア作家の作家的良心が全くない場合、無害であるが、何時も同じ手を用ひるといふ意味で、彼等は民衆からの時間の奪取者であり、大衆の無智の部分を保留しようとしての忠実な努力者だといへるであらう。
ナンセンスの社会学
害のない読物であれば、それが無害であるといふ理由でどれほど反覆流布されてゐてもいゝものであるかどうか、無害なものは有害でないといふ意味で世の中に通用し、のさばつてゐるものがまことに多い、一言で言へば、それは有つてもなくてもいゝものだ、だから無い方がいゝのだ、内務省や警視庁の取締方針には、そこのところが、はつきりしないものがある、つまり無害なものは無益であるといふ意味で「有害」であるといふ取締方針がたつてゐるかどうか、なぜ私はそのことを明瞭に言ひ切ることができるかといふに、大人の通俗読物に対して、子供の通俗読物のことを較べて考へてみるからである。
そのことに就いては、内務省でも手を焼いた筈である、子供読物のナンセンス化、卑俗化がそれである、しかも現在子供読物が卑俗化したといふ道筋を考へてみると、始めから悪い読物であつたわけではあるまい、始めは無害な状態で、それから漸次有害なものとなつたであらう、そして現在はどうか、当局の取締りが利いて、子供読物はたいへん「無害」なものが多くなつてきたのである。
子供のかつての読物の中からは、悪い素材は追ひ出されたがそれと入りかはりに良い素材が入らなかつた、さうした意味で現在の子供読物は、出版の最も消極的な可能性に、出版業者も子供物執筆者も立つてゐる、本が出さへすれば良いといふ、検閲通過の立前から、一見有益さうにみえる無害読物がでゝゐるのである、そこの点が、一つの問題の基点となる、子供といふ肉体的精神的に成育のはげしいものに、無害なナンセンスなものを、何時も同じ状態に於て与へてをいてどういふことになるか、マイナス許りつづくやうな読物を与へておいていゝだらうか何時もゲラゲラ笑つてゐるナンセンス青年をつくりあげるための子供読物がまことに多く、国家の文化的政策の眼の届かなさが、すでに子供の頃からその読物によつて、国民の精神的肉体的弱体化が行はれてゐるのである。
このことは直に大人の読物に当てはまるのである、大人も子供も変りがないのである、思索的訓練の全く欠けたところに、立派な国民的人格はないのである。
ユーモア小説とか、ナンセンス小説の類には、むしろさうした隠れた害悪性が多く、その害悪性はとかく見遁され勝ちである、何故であらう、それは無害な読物のやうに感じさせるからである、これらの大衆にうける最大の理由は読者の精力の消費の節約にあるといはれてゐる、読むのに負担がかゝらないといふことが条件となつてゐる、しかしそのことは、それだけでは済まない、それは「民衆が享楽的でありたい」といふその慾望を、これらの大衆小説出版者、執筆者が忠実に果してゐる、ユーモア作家の中では、さうしたユーモア小説そのものが包含してゐる、悪徳性を合理化ささうとして、精一杯文章の中で小細工をしてゐる作者も見受ける「僕は銀ブラ分子を軽蔑してゐるものだ」とか「かういふ手輩は満洲に行つて精神を入れかへてくるべきだ」などと国策的な教訓的な一章を加へて、文章全体の飾りリボンにしようとしてゐる。しかし大人もまた発育するものと認めて、私はかうした無害ではあらうが、国民を啓発する何ものをも持たない作家と作品とを否定したい。それは「無益なものは有益でない」といふ立前からである。
無題
小熊秀雄(오쿠마 히데오)
稀代の妖婦お定の事件があつた頃、或る精神分析学者が、斯ういふ意見を発表してゐた。
それはお定が性的象徴物を持ち逃げする心理は、サロメ心理で、お定の卵子本能がそれをさせた――といふのである、そこまでは肯定してをくとして、彼は戦争と結びつけて、鼻は男性の、目は女性の象徴であつて、昔時戦争に耳を斬つて凱旋してきたのは、屈服した敵を女性と見なして持ち帰る上下倒錯の心理であるといふのである。
稀代의 妖婦 오죠오 사건이 있던 무렵 어는 정신분석학자가 이러한 의견을 발표 하였다. 그것은 오죠오가 性的상징물을 갖고 달아나는 심리는 salome心理로 오죠오의 卵子본능이 그렇게 만들었다___하고 말하는 것이다,거기까지는 긍정해 놓고서 그는 전쟁과 결부시키어 코는 남성을 눈은 여성의 상징이었고 옛날의 전쟁에 귀를 잘라 凱旋한 것은 굴복한 적을 여성으로 보고서 가지고 돌아가는 上下倒錯의 심리라고 하는 것이다.
とかく非科学的な心理学者は、一切の心理現象を、性と結びつけたがるが、ここでも戦争などといふ切迫した現実的な事件を、性一色で塗りつぶして解釈しようと企てる、今度の支部事変には、優秀な心理学者が従軍してゐるが、私はそれを知つたとき、さすがは文化国だけはあると感心したものだ、兵器の操作もさることながら、心理学者が戦場に於ける兵士の心理状態を研究するといふ仕事も、今後の戦争に寄与することが大きい筈である、そして戦時中は心理学者はみな戦線に出て、兵士の心理状態を調べたらいいし、戦争が済んだら銃後の国民の心理状態を調べることが報国的である、戦争に勝つにも負けるにも卵子本能だなどといふ馬鹿気た考へ方は、少くとも戦争といふものを侮辱した考へ方といへるだらう。
어쨌거나 비과학적인 심리학자는 일체의 심리현상을 性과 결부하고 싶지만 여기서도 전쟁등이라 하는 절박한 현실적인 사건을 性 일색으로 착색해서 해석하려 하며 이번의 支部事變에는 우수한 심리학자가 종군하고 있지만 나는 그것을 알았을 때 과연 文化國이기는 하구나 하고 감동한 것이며 무기의 조작도 하면서 심리학자가 전장에 있어서의 병사의 심리상태를 연구 한다고 하는 일도 今後의 전쟁에 기여하는 바가 커야만 할것이며 그리고 戰時중에는 심리학자는 모두 전선에 나가서 병사의 심리상태를 조사하면 좋으며 전쟁이 끝나면 총뒤의 국민의 심리상태를 조사하는 것이 報國적이고
전쟁에 이기는 것도 지는 것에도 卵子본능이다 라고 하는 바보같은 사고방식은 적어도 전쟁이라고 하는 것을 모욕한 사고방식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首を取り候共捨て、耳鼻ばかり――』と日本の昔の大将が下知をしてゐる、かういふ命令が下ると、雑兵達は敵の首を、漬物をつけるときにキャベツを扱ふやうに転がしながら手早くその首から耳か鼻を削ぎとるのである、然もその削ぎ取り方も、口びるをかけてそぎとる、理由は口びるをかけて削ぐと必ず髭もくつつくからである、髭を必要とするのは髭がついてゐないと『女、わらべ』のものを持つてきても大将は誤魔化されるからだ、これでみると昔の戦場には、数でこなしてやれ――といふ不心得者がゐて、女、わらべ、所謂今でいふ非戦闘員の首まで掻きあつめて論巧にあづからうとしたものらしい、もし敵が若い男で鬚を生やしてゐなかつた場合には『若年者に髭なく候付何ぞ其物の道具を取可申侯事』と念入りに命令してゐる。
<목을 따되 버리고 귀와 코만___>하고 일본 옛날의 大將이 명령을 하고 이러한 명령이 내려지면 졸병들은 적의 목을 김치 담글때에 배추를 다루듯이 굴리면서 재빠르게 그 목에서 귀와 코를 잘라 내는 것이며 게다가 그 자르는 방법도 입같은 것을 걸어서 잘라 내며 이유는 입같은 것을 걸어서 자르면 반드시 수염도 붙어 있기 때문이고 수염을 필요로 하는 것은 수염이 붙어 있지 않으면<여자, 어린애>의 것을 가지고 와도 大將은 잘못 혼동되기 때문이니 이것으로 보면 옛날 전장에는 數로 처리하자___라고 하는 무분별한 것이 있어 여자,어린애 소위 지금으로 말하는 비전투원의 목까지 모아서 論巧하게 취급하였던 싶으며 만일 적이 젊은 남자로 수염을 기르지 않았던 경우에는 <젊은이가 수염이 없는 경우에는 뭔가 그 물건의 道具를 취함도 可할것임>하고 신중하게 명령을 한다.
これでみても耳を斬るのは、敵を女性と見なすなどといふ心理主義者の考へ方と、実際の戦争への参加者の、実利的、効果的な考へとはちがふ、一枚でも耳を多く獲たといふことが自己の武勇を証明し、勲巧に関係するといふ切実な問題なのである。
이것으로 보아도 귀를 자른다는 것은 적을 여성으로 본다고 하는 심리주의자의 사고방식과 실제의 전쟁에의 참가자의 실리적 효과적인 생각과는 다르며 하나라도 귀를 많이 얻는다고 하는 것이 자신의 武勇을 증명하고 勳功에 관계한다고 하는 절실한 문제인 것이다.
戦争が一つの錯倒心理を生むといふ考へ方の中にも疑問がある、突然味方の塹壕からとび出して敵の方へ走つてゆかうとする、味方の者は寄つて集つて、彼を押へつける、すると彼はまもなく昂奮が去つて、けろりとしてしまふといふ塹壕病患者であつても、かうした心理の錯倒状態を治すには、彼の心の中に恐怖といふ心理が起らないやうな別な環境に彼を移したら治つてしまふのである。アニシーモフといふ反逆者が、死刑場に引きだされるとき、彼はせかせかと自分の帽子を探し始めた、『さあ、未だですか――』とロシヤ将校が彼にきくと『直ぐです……一寸帽子が』『そんな事は何うでもいゝです、帽子なんか無くたつて構ひません――』といつてゐる。
전쟁이 하나의 도착심리를 낳는다고 하는 사고방식중에도 의문이 있으며 돌연 아군의 塹壕에서 튀어 나가서 적군으로 달려 가려고 하면 아군들은 몰려 와서 그를 저지하며,하면 그는 갑자기 흥분이 사라지고 정신을 차리고 만다고 하는 참호병 환자였다 하여도 이러한 심리의 도착상태를 치료하려면 그의 마음속에 공포라고 하는 심리가 일어나지 않을듯한 다른 환경에 그를 옮기면 고칠수가 있는 것이다.아니시모프 라는 반역자가 사형장에 끌려 나갈 때 그는 불안하게 자신의 모자를 찾기 시작했으며 <자!아직도!!>하고 러시아 장교가 그에게 묻자 <금방입니다..작은 모자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모자 따위 없어도 관계 없어!>라고 말하고 있다.
いま死刑にされる男が、何時ものやうに帽子をかぶらなければ気が済まない心理といふものは逆上の心理ではない、平和といふコップに人間がいれられてゐると仮定して、このコップを急にひつくりかへして卓上にをいたとしたら、中の人間は逆さまになつて考へてゐるより仕方がないだらうか、錯倒の心理を言ふ前に先づ容れ物を論ずるのが穏当だと思ふ、
지금 사형을 당하는 남자가 어느때처럼 모자를 쓰지 않으면 맘이 안 놓이다고 하는 심리라고 하는 것은 逆上의 심리는 아니며 평화라고 하는 cup에 인간이 들어가 있다고 가정하여 이 cup을 갑자기 뒤집어서 탁자위에 올려 놓는다면 안에 있는 인간은 거꾸로 되어서 생각할 수밖에 없을뿐더러 도착의 심리를 말하기 전에 먼저 容器를 論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画家・詩人・娘達
畵家,詩人,娘達 (화가,시인,아가씨들)
小熊秀雄(오쿠마 히데오)
始めこの文章を書かうとしたとき、その題材を画家・詩人・とだけしようとしたが、画家・詩人といふ階級は、相当にうるほひのある階級であるが、やつぱり娘達を加へた方が、文章がずつと豊饒になりさうな気がして、標題のやうにした、娘達はやつぱり『人生の花』だから、取り合せ、付け合せとしても必要なやうである。文章にせよ、絵を描くにしても、最初の手順といふものが肝心だから、文章の中に始めから娘を加へるといふ、政策をとるといふことは、すでにこの文章を読者諸君が最後まで読んでくれるといふ保証がついたやうなものである。あまり強情になつてセピアばかりを基調色にして、制作を押しきるのは良くない。やつぱり赤はちよつぴりと画面に加へる必要がある。娘とは色彩にしてみては『赤』だ。赤の加はらない文章などいふものは殺風景で読まれるものではない。赤系統の絵具を軽蔑する画家は、そのヱゴイズムとともに滅亡するやうなものである。
처음에 이 문장을 쓰려고 했을 때 그 題材를 畵家,詩人이라고만 하려고 하였지만 畵家,詩人이라고 하는 계급은 상당히 情感이 있는 계급이지만 역시 아가씨를 넣는 쪽이 문장이 훨씬 풍요하게 될듯한 기분이 들어 標題처럼 하였고 아가씨는 역시 <인생의 꽃>이기에 具色이나 副材料로서도 필요한듯 하다.문장으로 하던지 그림을 그린다 하여도 최초의 수순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문장속에 처음부터 아가씨를 넣는다고 하는 정책을 취한다고 하는 것은 이미 이 문장을 독자제군이 최후까지 읽어 준다고 하는 보증이 붙은 듯한 것이다.너무 완고하게 되어서 暗褐色만을 기조색으로 하여 제작을
강행하는 것은 좋지 않다.역시 빨강은 조금 화면에 넣을 필요가 있다.아가씨는 색채로 보면 <빨강>이다.붉은 색이 넣어지지 않는 문장등이라고 하는 것은 殺風景으로 읽어지지 않는다.빨강 계통의 그림물감을 경멸하는 화가는 그 egoism과 함께 멸망할듯한 것이다.
私は詩をつくつてゐるために、非常な誤解を招く。そして画家はどうか、絵を描いてゐるために、非常に世間の了解を得てゐる。私はスケッチをやり始めるやうになつた動機はいろいろあるが、その一つには、誤解を避けるためといふこともあつた。私は街をうろつくことが好きで、さうした街の漂泊のうちに、さまざまな生きた人間の姿を捉へようとする。山の手に住んでゐると、下町の状態がわからない。それでまず近くの板橋付近から、丸ビル、本所、浅草といふ風に、うろつきまはる。小さな露地に踏みこむと、そこには思ひがけないやうな、珍らしい人生をみつけだす。しかも下町の生活者たちはどんな小さな家の中でも、労働的で生産的なのである。何かしら判らないが原始的な小さな車の機械を亭主が廻してゐると、その傍で妻君やら、子供やら、職人やらが何やら忙がしく指先をうごかして商品の包をつくつたり、部分品を揃へたりしてゐる。内職ではない。内職より少し規模の大きいやうな家内工業をしてゐる家がびつしり列んでゐる。
나는 詩를 짓고 있기 때문에 대단한 오해를 초래한다.그리고 화가는 어떤가?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세상의 了解를 얻고 있다.나는 sketch를 하기 시작한것처럼 된 동기는 여러 가지 있지만 그 하나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라고 하는 것도 있었다.나는 거리를 방황하는 것이 좋으며 그러한 거리의 漂泊속에서 다양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잡으려고 한다.고지대에 살고 있으면 서민층의 상태를 모른다.그래서 우선 가까운 板橋(이따바시)부근에서 마루 빌딩,本所(혼죠),淺草(아사쿠사)라고 하는 식으로 돌아 다닌다.작은 露地를 밟으면 그곳에는 생각도 못한듯한 진기한 인생을 발견해 낸다.게다가 서민층의 생활자들은 아무리 작은 집안에서도 노동적이고 생산적인 것이다.뭔지는 알수가 없지만 원시적이고 작은 車의 기계를 집주인이 돌리고 있으면 그 옆에서 처나 아이들 職人들이 뭔가 바쁘게 손끝을 움직여 상품의 포장을 만들거나 부분품을 조립하고 있다.부업은 아니다.부업보다 조금 규모가 큰듯한 가내공업을 하고 있는 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私はその状態が珍らしくて、洋服のズボンに両手を突つこんで、その家の傍に立つて中の有様をみてゐる。しかし他人の働いてゐるところを見てゐたり、また働いてゐる人の側からみて、遊び人のやうな男が、ぼんやり立つて、自分たちのする仕事をみてゐるといふことは気持の良いことではない。それは勤勉と懶怠とがあんまり対立することになるからであらう。
나는 그 상태가 진기하여 양복 바지에 두손을 꽂고서 그 집 옆에 서서 안의 모습을 보고 있다.그러나 다른 사람이 일하고 있는것을 보고 있으면 또 일하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노는 사람 같은 남자가 멍하니 서서 자신들이 하는 일을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은 기분이 좋은 일은 아니다.그것은 근면과 나태가 너무나도 대립하는 것이기 때문 일것이다.
工場の中などを見たくて立つてゐると、中の労働者が、その油だらけの顔で、この私といふ存在を、一つの有閑階級とみて、軽蔑的な表情をし、時には声を立てて笑ふこともある。私にとつては明らかに誤解だ。民情視察とか、労働街見学とかいふお役人的なもつたいぶつた漂泊ではないので、足にまかせてあるく。そしてその時に応じて、強く印象をうつたものに観察的であらうとする。また全く無印象な状態、普通人の感覚では全く平凡とされるやうな状態に、却つておどろくやうな場合もある。さうしたさまざまな観察の中で、政治家などが到底思ひもとどかないやうな人間生活の状態をさうした漂泊の途上でみつけだす。そしてそれを公表する。それが仕事なのである。しかしさうした目的の下に街をあるいても、他人はそこに有閑さうな一人の人間を発見するだけである。その誤解を避けるために、私はいつの間にか、スケッチブックを抱へて歩くやうになつた。
공장 안을 보고자 서 있으면 안의 노동자가 그 기름 투성이의 얼굴로 이 나라고 하는 존재를 하나의 유한계급으로 보고 경멸적인 표정을 짓고 때로는 소리를 내어 웃기도 한다.나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오해다.민정시찰이라던가 노동가의 견학이라고 하는 公人같은 무게를 잡는식의 漂泊은 아니기에 발 가는대로 걷는다.그리고 그 때에 응하여 강하게 인상을 주는것에 관찰적이고자 한다.또 전혀 無印象적인 상태,보통사람의 감각으로는 전혀 평범하게 되는듯한 상태에 오히려 놀라울듯한 경우도 있다. 그러한 여러 가지의 관찰 속에서 정치가등이 도저히 생각도 미치치 못할 듯한 인간생활의 상태를
그러한 漂泊의 途上에서 발견해 낸다.그리고 그것을 공표한다. 그것이 일인것이다.그러나 그러한 목적하에 거리를 걸어도 타인은 그곳에 有閑한듯한 한사람의 인간을 발견 할뿐이다. 그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나는 어느샌가 sketch-book을 안고 걷게 되었다.
事変が始まつてからは、工場地帯の軍需工場付近をウロウロしてゐると、ろくな目に逢はないので、その方面には出かけないことにしてゐるが、もつと自由な頃は、かなり工場の門内に奥ふかく入りこんで、労働者の機械の操作を眺めてゐることができた。スケッチブックを抱へてゐることで、先方では画家だときめてくれるので、画を描く材料でも求めにきたものだらうといつた気安い眼でゐてくれる。しかし悲しいことにはここでも誤解がつきまとふ。私は画家でなくて詩人なのである――。しかし手ぶらで街をうろついて誤解を深められるよりは、画家と誤解されて、誤解をその限度で打止められてゐる方が私としては気が楽だ。しかしそのうちにスケッチブックの白い頁を何かしら汚したいといふ欲望が起り初め、ときにはソッと描いてみることもある。そのうちに次第に大胆になり、はては大つぴらに街頭でスケッチブックを拡げてかきだすといふ度胸ができてきた。さうしてスケッチは数百枚にも溜つてしまつた。そのときに私は本職の画家のなかには、小心な人々もなかなかに多いのだと思ひ始めた。
事變이 시작되고 부터는 공장지대의 군수공장 부근을 어슬렁대고 있으면 이렇다 할만한 것은 볼수가 없기에 그 방면에는 나가지 않기로 하고 있지만 좀 자유로울 때는 제법 공장 문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노동자의 기계조작을 바라볼수가 있었다.sketch-book을 안고 있는 것으로 상대방은 화가라고 인정해 주기에 그림을 그릴 재료라도 찾으러 온것일것이라고 하는 편안한 눈으로 보아 준다.그러나 슬픈것은 여기서도 오해가 따라 붙는다.나는 畵家가 아니고 詩人인것이다.__그러나 손을 내리고 거리를 방황하여 오해를 깊게하기 보다는 畵家로 오해되어 오해를 그 한도에서 저지받는 쪽이 나로서는 기분이 좋다.그러나 그 사이에 sketch-book의 공백을 어떻게던지 더럽히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때로는 살짝 그려본 일도 있다.그러는 사이에 점차로 대담하게 되어 마침내는 공공연하게 가두에서 sketch-book을 펼쳐 그려 낸다고 하는 용기가 생겼다.그렇게 해서 sketch는 수백장이나 쌓여 버렸다.그 때에 나는 본직의 畵家중에는 소심한 사람들도 상당히 많은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自然を愛する――といふ名目が立てられて、東京を離れて、山や海を描きにゆく画家はかなりにある。私は東京に住んでかなりになる。ところが東京市中でカンバスを立てて絵を描いてゐる画家にぶつかつたことは全く無いといつてもいい。東京市内は絵にならないのだらうか。東京中には洋画家日本画家の数は、その孵化しない玉子も加へ足したら、おそらく数千人はゐるにちがひない。さうした多数の画家が住んでゐるのに、ひとりとして街の風景を描きにでてゐないといふ不思議な現象といふものを考へてみたのである。詩人がかうして街をうろうろし、時には専門外のスケッチをさへしてゐるのに、どうして専門の画家が街のスケッチに姿をみせないのだらうか。トルストイがあの厖大な創作をすることができたのは、題材的には、彼の半生の戸外生活からの収獲なのであらう。彼は馬にものり、戦争にも加はり、熊とも格闘をしてゐる。未開の娘の尻も追ひかけまはしたり、狩猟もやり、夜は夜でヤスヤナポリアナの村の小学校で子供達を前にして、一つ一つ星を指さして、人生の深淵を、平易な言葉で語り聞かさうと努力してゐる。彼の生活の戸外的な経験が、真個うの制作期に入つてから、実感的な幻像として、過去のことをつぎつぎと描きだし、文字の上に、記録されたのであらうと思ふ。
자연을 사랑한다___라고 하는 명목이 서고 동경을 떠나서 산이나 바다를 그리러 가는 畵家는 상당히 있다.나는 동경에 산지 상당히 된다.허지만 동경 시내에서 캔버스를 세우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畵家를 마주친 일은 전혀 없다고 하여도 좋다.동경 시내는 그림이 되지 않는것일까?동경 속에는 서양화가 일본화가의 수는 그 孵化하지 않은 알도 첨가하면 아마도 수천명은 될것에 틀림 없다.그러한 다수의 畵家가 살고 있는데도 혼자서 거리의 풍경을 그리러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 이상한 현상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본것이다.詩人이 이렇게 거리를 어슬렁대며 때로는 전문외의 sketch조차 하는데도 어째서 전문의 畵家가 거리의 sketch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것일까?톨스토이가 저 방대한 창작을 할수 있었던 것은 재료적으로는 그의 半生의 戶外생활에서의 수확일것이라!그는 말도 타고 전쟁에도 참가하고 곰과도 격투를 하고 있다.未開의 아가씨 엉덩이도 따라 다니기도 하고 사냥도 하고 밤에는 밤으로 야스야나보리아나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앞으로 하고 하나 하나 별을 가리키며 인생의 深淵을 평이한 언어로 들려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의 생활의 戶外적인 경험이 진실된 제작기로 들어가고 나서 실감적인 환상으로서 과거의 일을 지속적으로 그려 내고 문자상으로 기록된 것일것이라고 생각한다.
トルストイの場合、半生が戸外的で、半生が書斎的であつたといふことも、後者の書斎的である理由も、いかにも正当な感をうける。しかし私の友達の若い小説をやる友人や、若い勉強盛りの洋画家などで、全く若い癖に書斎的、室内的な人が少くないのである。直感を信じまた直感を訓練するには、眼を信頼するより他に手段がない。『君、済まんがマチヱがわからんから、ちよつとさはらして呉れ給へ――』とモデルに懇願する彫刻家もあるさうであるが、眼の機能をさういふ風に軽蔑してゐるこのやうな彫刻家になどは、さはらしてやつたところで判るものではないだらう。画家は読書の欲望が低いことは昔からのことで、また昔気質の洋画家仲間では、絵描きが本を読んでゐるなんて――と頭からそのことを馬鹿にしたものである。それは技術本位の職人性を尊重する時代の風習であつた、本を読み、理屈をいふよりも描け――といふ作家態度が、優れた態度だといふことになつてゐた。
톨스토이의 경우 半生이 戶外적이고 半生이 書齋적 이었다고 하는 것도 후자의 書齋적인 이유도 상당히 정당한 느낌을 받는다.그러나 나의 친구의 젊은 소설을 하는 友人이나 젊은 한창 공부중인 서양화가등에서 전혀 젊은 주제에 書齋적,室內적인 사람이 적지 않은것이다.직감을 믿고 직감을 훈련하는 것은 눈을 신뢰하는것 이외는 수단이 없다.<자네!미안하지만 마찌에를 모르니까 좀 만져 주게__>하고 모델에게 애원하는 조각가도 있다고 하지만 눈의 기능을 그러한 식으로 경멸하고 있는 이러한 조각가 등은 만져 준다고 해서 아는것은 아닐것이다.畵家는 독서의 욕망이 낮다고 하는것은 옛날부터의 일로 또 옛날 기질의 서양화가 중에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책을 읽고 있다는 둥___하고 머리부터 그것을 바보로 한 것이다.그것은 기술본위의 職人性을 존중하는 시대의 풍습이었으며 책을 읽고 논리를 말하기 보다는 그리게!__라고 하는 작가태도가 훌륭한 태도라고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しかし時勢は少し許りちがつてきてゐる。近頃の若手の画家のアトリヱには、文筆家以上に書棚に本をぎつちり詰めてゐる人も少くない。私などは是非読んでおかなければいけないと思つてゐた文学の本が、専門外の画家の書棚にちやんとある。例へ彼が買つたままで、飾つたままで永久にそこの位置にをかれたままであるとしても、読みたいと考へながらも、手元にも据ゑておかないでゐる私よりは勉強家なのである。
그러나 時勢는 조금은 달라지고 있다,요즈음의 젊은 화가의 아트리에 에는 문필가 이상으로 책장에 책을 빽빽이 채우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나는 꼭 읽어두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문학책이 전문외의 화가 책장에 쨘~하고 있다.설령 산채로 장식한 채로 영구히 그곳의 위치에 놓아 둔채로 한다 하여도 읽고 싶다고 생각은 하지만 손 가까이에 놓아 두지 않고 있는 나보다는 공부파인것이다.
画家の読書力は全体には盛んになり、ジイドや、ドストイヱフスキイや、新しい哲学書などを揃へてゐる。
화가의 독서력은 전체적으로는 활성화 되어 지이드나 도스토에프스키나 새로운 철학서 등을 갖추고 있다.
都会と糖分(도회와 당분) 1940年
小熊秀雄(오쿠마 히데오)
国民生活の無駄の排除といふことが叫ばれてゐる、然しこれは都会人にそれを求めることはできないし、地方人にはまたとつくに無駄などといふものはないであらう、『一汁一菜』を都会で主張されたとき、これまでとつくに一汁一菜で済ましてゐた農村人のなかでは、さうしたスローガンを鼻の先で笑つたさうだが、それは全くの話で、いつたいどの国民層に対して、食卓の上を質素にせよといふことを要求してゐるのか、はつきりしない、それでは都会人の食卓の上はそんなに贅沢かといふと問題なのである、都会でも一汁一菜などを実行しようものなら、死んでしまはなければならない、何故なら、前述のやうに、乗合自動車にのるにも押し合ひ、へし合ひの精神的肉体的な消費があり、交通地獄の都会の交叉点を、五個所も踏み切るときは、いかに純粋な都会生活者でも、神経の使ひ方は非常なものなのである、ただそれをはつきりと感じてゐないだけなのである、地方から東京に出てきた人はそれを経験したことであると思はれるが、田舎から東京に着いた途端に、精神の昂奮があり一種の軽微な神経衰弱の状態に陥るものなのである。
국민생활의 無益의 排除라고 하는 말을 부르짖고 있는데 그러나 이것은 都會人에게 그것을 요구할 수는 없으며 地方人에게는 또 특히 無益한것만은 아닐것이며 <국 한그릇,반찬 한가지>를 도회에서 주장 되었을 때 지금까지 시골에서 국 한그릇,반찬 한가지로 지내고 있던 農村사람들 중에서는 저러한 slogan을 코웃음 치는 듯 하지만,그것은 천만의 말씀으로 도대체 어느 국민층에 대하여 식탁 위를 간소하게 하자고 하는것을 요구하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으며 그렇다면 都會人의 식탁 위에는 그렇게 사치스러운가 하면 문제인것이며 都會에서도 국 한그릇,반찬 한가지 등을 실행 하려고 한다면 죽어버리지 않으면 안되며 왜냐하면 전술한 바와 같이 승합 자동차를 타는것도 밀고 댕기고 하는 정신적 육체적인 소비가 있으며 교통지옥의 都會의 교차점을 다섯군데나 지나갈 때는 아무리 순수한 都會생활자라도 신경이 쓰이는것은 대단한 것이며 단지 그것을 확실하게 느끼지 않고 있을 뿐이고 지방에서 동경으로 나온 사람은 그것을 경험했을것으로 생각 되지만 시골에서 동경에 도착한 순간에 정신의 흥분이 생겨 일종의 경미한 신경쇠약 상태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だから都会人の日常生活の食糧にしても、地方人の三倍の栄養を必要とされてゐて、そしてさつぱり壮健になれないでゐるのである、砂糖が欠乏したときの状態も、これは地方人の家庭で砂糖がないといふ状態と、心理的にはまつたく違ふと思はれる、平素から煮物に砂糖が多く使はれてゐるといふことは、単純な理由ではない、都会生活の疲労の度合が甚しく、都会人が甘いものを要求することは、殆んど病的な位である、コオヒイ店や、お汁粉屋が東京に馬鹿々々しく多いといふこともその間の事情を語るものがある、女学生、中学生はお汁粉屋に、そして大学生はコオヒイ店に、労働者、商店員はミルクホールに、そしてサラリーマンは勤務がひけてもまつすぐに家庭には帰らない、それはこの人達が不道徳だからではなく、一日の生活の心労がさうさせるのである、サラリーマン達は朋輩とおでん屋で一杯のんでから帰るのである、これらの階級の以上の人々は、どういう方法で都会の心労を癒してゐるのか私は知らない、都会の一汁一菜が不可能な理由は都会で健康を保つには、何んでも喰ふといふ雑食主義でなければならない、食料だけの問題ではない、日曜祭日の休日になると、東京のサラリーマンは、どんどんと郊外にピクニックにでかける、そしてそれが遊び好きな享楽的な印象を与へる、しかし事実は異なる、一週間にたつた一日だけ、恰度金魚が汚れた鉢の水をとりかへて貰ふことを待つてゐるやうに、休日の来るのを待つてゐる、そして自然の清澄な郊外の空気を、金魚のやうにパクパクと吸ひに出かけるのである、考へてみれば非常に惨憺たるものなのである、時[#「ママ」の注記]変下の東京は、決して地方とその労苦を共にしてゐないのではなく、その労苦は等しい、ただ苦労の姿格好が異なるだけである。
따라서 都會人의 일상생활의 식량에 있어서도 地方人의 세배의 영양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그리고 산뜻하게 건강하게 되지 않는것이고 사탕이 결핍했을 때의 상태도 이것은 地方人의 가정에서 사탕이 없다고 하는 상태와 심리적으로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되며 평소부터 요리에 사탕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고 하는것은 단순한 이유만은 아니며 도회생활의 피로의 상태가 심하고 都會人이 단 것을 요구하는 것은 거의 병적일 정도이고 커피 가게나 빵집이 바보처럼 많다고 하는 것도 그 사이의 사정을 말하는 것이며 여학생,중학생은 빵집으로 그리고 대학생은 커피 가게로 노동자,상점원은 milk-hall로 그리고 샐러리맨은 근무가 끝나도 바로 가정에는 돌아가지 않으니 그것은 이 사람들이 부도덕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루 생활의 心勞가 그렇게 만든 것이고 샐러리맨들은 친구들과 오뎅집에서 한잔을 마시고 나서 돌아가는 것이며 이러한 계급의 이상과 같은 사람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도회의 心勞를 치유하고 있을지 나는 모르며 도회의 국 하나 반찬 한가지가 불가능한 이유는 도회에서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무거나 먹는다고 하는 잡식주의가 아니면 안되며 식량만의 문제만은 아니고 日曜祭日의 휴일이 되면 동경의 샐러리맨은 북적대고 교외로 소풍을 나가며 그리고 그것이 놀기를 좋아하는 향락적인 인상을 주나 사실은 다르고 일주일에 단 하루만 마치 금붕어가 더러워진 어항 물을 갈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휴일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으며 생각해 보면 대단히 참담한 것으로 時變하의 동경은 결코 지방과 그 노고를 함께 하고 있는것이 아니라 그 노고는 같으나 단 노고의 모습 정도가 다를 뿐이다.
詩に触れて (詩에 接하여)
小熊秀雄(오쿠마 히데오)
詩論といふ、まとまつた論評の形式をとることは、今の私にとつては全く興味がわかない。その理由に就いては、私よりも、一般の読者や、所謂詩壇人の方が、よくわかつてゐるやうに思ふ。所謂日本の詩壇で「詩論」などといはれてゐる評論形式が、砂を噛むやうな独断的な文章であること、民衆の一般的な生活には、何のかゝはりもない文章であることは衆知の事実である、何よりも自分の欲することは「自由な形式」のそれである。若し私は「詩論」を書かなければならない立場に至つたとしたなら、それは相手があつて、論争をする時であらう、こゝでは詩論ではない「詩に触れて」である。
詩論이라고 하는 명확한 論評의 형식을 취하는것은 지금의 나에 있어서는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그 이유에 있어서는 나보다도 일반 독자나 소위 詩壇人쪽이 잘 알고 있을것으로 생각한다. 소위 일본의 詩壇에서<詩論>등이라 말해지고 있는 評論형식이 모래를 씹는듯한 독단적인 문장이라는 것, 민중의 일반적인 생활에서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문장인것은 衆知의 사실이며 무엇보다도 자신이 원하는 것은 <자유로운 형식> 그것이다.만일 나는<詩論>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입장에 이른다고 한다면 그것은 상대가 있어서 논쟁을 할 때일것이며 여기서는 詩論은 아닌 <詩에 接하여>이다.
現在の日本のありさまは、政治的な方面も、経済的方面も、近年まれな圧縮された状態にをかれてゐる、この「圧縮」された状態といふものは、その物質的根拠を探すまでもなく、つまりどうして世の中がかう突きつめた状態にをかれてゐるだらうかと、数字、統計的な立場から調べるまでもなく、物質的根拠と相対的位置にある精神的根拠の立場から考へてみるだけでも、時代の現象は感得できる、いま詩を論じ、また詩をつくるといふ、精神状態と、突きつめた圧縮的な世間の状態とは、全く同じである。
현재의 일본 모습은 정치적인 방면도 경제적 방면도 近年에 드물게 압축된 상태에 놓여 있으며 이 <壓縮>된 상태라 하는것은 그 물질적 근거를 찾을것도 없이 즉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 쑤셔 넣은 상태에 놓여 있을수가 있는가 하고 수학,통계적인 입장에서 조사할 것도 없이 물질적 근거와 상대적 위치에 있는 정신적 근거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것 만으로도 시대의 현상은 느낄수가 있으며 지금 詩를 논하고 또 詩를 짓는다고 하는 정신상태와 쑤셔 넣은 압축적인 세상의 상태와는 전적으로 동일하다.
したがつて一人の詩人も半欠けの詩人も日本に存在しなくても(事実は何んてうぢや、うぢやと居ることよ)誰も侮るものがなければ、惜しむものはゐない、詩人がこの世にをらなくても、「現実と称する詩」はりつぱに存在するからである。毎日の新聞は、限られた紙面に、なるべく沢山の事実を盛るといふ意味で、新聞記者は、報道の文章を、極限的に短かく圧縮的に書いてゐる、一方もろもろの現実の出来事のうちからニュース価値といふ基準を設けて、掲載する事件を選択しなければならない。何もかも無選択に新聞にはのせられない。この選択の現れは、社会的な抽象性として、うつかり読み流すときは何の変槌もなく、これに多少の批判的な眼を加へるときは、平凡と見える新聞記事が意外に文章の背後に複雑さ真実を横たへてゐることとが多いであらう。こゝでも新聞材料の選択その抽象の方法は、新聞面を圧縮的な緊張感のみなぎつたものとして、毎日の新聞に対する興味は少くない下手な詩人の、愚かしい詩を読む時間を、新聞を読むことにふりむけても、決して民衆の悔はないのである。その意味では、日本の現在の大部分の詩人の思想の低劣な度合は、新聞社の雑報記者にも劣ることは勿論、新聞社の給仕君の感覚的動きにも及ばないのである。
따라서 한사람의 詩人도 반이 모자라는 詩人도 일본에 존재하지 않아도 누구도 경멸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애석해 하지도 않으며 詩人이 이 세상에 없어도<현실이라고 칭하는 詩>는 훌륭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매일의 신문은 한정된 지면에 될수 있는한 많은 사실을 담는다고 하는 의미로 신문기자는 보도의 문장을 극한적으로 짧게 압축적으로 쓰고 있으며 한편 여러 가지 현실의 사건 속에서 뉴스 가치라고 하는 기준을 설정하여 게재하는 사건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어쨋거나 無選擇으로 신문에는 올릴수가 없다. 이 선택의 출현은 사회적인 추상성으로서 멍하니 읽어갈 때는 아무런 특별한 椎도 없이 여기에 다소의 비판적인 눈을 가할 때는 평범하게 보이는 신문기사가 의외로 문장의 배후에 복잡한 진실을 갖추고 있다고 하는것이 많을 것이다. 여기서도 신문재료의 선택 그 추상의 방법은 신문명을 압축적인 긴장감이 넘치는 것으로서 매일의 신문에 대한 흥미는 적지 않게 서툰 詩人의 바보스런 詩를 읽는 시간을 신문을 읽는것에 관심을 가져도 결코 민중의 후회는 아닌것이다. 그 의미로는 일본의 현재의 대부분의 시인의 사상의 열등한 정도는 신문사의 雜報기자에도 못미치는 것은 물론 신문사의 급사君의 감각적 활동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しかし或る詩人は反駁してかういふであらう「我々詩人と雑報記者と、いつしよにするのは酷すぎる。詩人には雑報記者の欠けてゐる、所有してゐない、高貴な精神がある。高邁な理想がある――」と、さういふ意味では、世間に流布されてゐる、現在の詩人の作といふものが、どれを読んでみても、「高貴」さうな「高邁」らしい、詩が多いことであらう。
그러나 어는 시인은 반박하여 이렇게 말을 할것으로 <우리들 시인과 雜報기자와 함께 하는것은 너무 가혹하다.詩人에게는 雜報기자에 빠져 있는 소유하고 있지 않은 고귀한 정신이 있다.고매한 이상이 있다___>하고,그러한 의미로는 세상에 유포하고 있는 현재의 詩人의 작품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읽어 보아도 <高貴>한듯한 <高邁>다운 詩가 많을 것이다.
私は然しこゝでかう断言できる。高貴でなくても、高邁な精神をもたなくても、結構詩といふものは出来るものだと――、そのことは、私自身が証明してゐるから確かだ。私は高邁でなくてもいゝから、第一流の雑報の記者のやうにありたい位に思つてゐる。私はかう文章を書きすゝめてくると、私の考へが多くの詩人達の考へと、ますます開きのある意見を述べる結果になることを予感する。事実そんな形になるであらう。そのことは煩はしい、論争でないかぎりメタン瓦斯的詩壇の雰囲気に接近することを、極度に避けてゐる理由の一つには、私の詩論と、他の人の詩論とはどこにも接触点がないことが余りにはつきりしてゐるからである。世間ではよく、以前は詩の愛読者であつた人が「近頃の詩はどうもわからない」と言つてゐるのを耳にすることがある。この昔の詩のファンは、ホイットマンを限度にして、それ以来の詩はどうも難解になつてきて、理解できなくなつてゐるのである。
나는 그러나 여기서 이렇게 단언 할 수가 있다.고귀하지 않아도 고매한 정신을 갖지 않아도 훌륭한 詩라고 하는 것은 생길수 있는것이다!하고__그것은 나 자신이 증명하고 있기에 확실하다.나는 고매하지 않아도 좋으니 一流의 雜報기자처럼 있고싶을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나는 이렇게 문장을 계속 써오면 나의 생각이 많은 시인들의 생각과 점점 차이가 나는 의견을 말하는 결과가 될것을 예감한다. 사실 그러한 형태가 될것이다.그것은 성가시고 논쟁이 아닌 한 methane gas적 詩壇의 분위기에 접근하는것을 극도로 피하고 있는 이유의 하나로는 나의 詩論과 다른 사람의 詩論과는 어느 곳에도
접촉점이 없는것이 너무나도 확실하게 있기 때문이다.세상에서는 흔히 이전은 詩의 애독자였던 사람이 <요즈음의 詩는 도무지 모르겠어!>라고 말하고 있는것을 귀에 접한 일이 있다.이 옛날의 詩fan은 Whitman 을 한도로 하여 그 이래의 詩는 너무 난해해졌으며 이해할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その当時の日本の詩人のお手本が、ホイットマンであつた限りは、その形式の平易と判り易さ、自然美のとりいれ方にをいて、まだこの昔のファンは、日本の詩人の作にも眩惑されてゐたのである。それ以来は社会状態の速度を加へた変化の仕方も理由になるが、他の面では、無選択な難船の人のやうに外国の詩人を、あれこれと手に触れるものに、しがみついた状態であつた。悪いことにはそのしがみついた外国詩人は、フランス、英国といつた形式主義的な、心理的享楽の度合の濃度な詩人のみであつたため、日本の詩人の民衆に提供した詩は、全くわけのわからぬ詩語で満たされた詩のみで、民衆の詩からの離散、詩への失望は、年とともに深くなつて行つたのである。
그 당시의 일본의 詩人의 자습서가 Whitman이었던 한은 그 형식의 平易와 알기 쉬움,自然美의 수확에 있어서 아지 이 옛날의 fan은 일본의 시인 작품에도 현혹되고 있는것이다. 그 이래는 사회상태의 속도를 가한 변화의 양상에도 이유가 되지만 다른 면으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難船의 사람처럼 외국의 詩人을 이것 저것 손에 접하는 것에 매달린 상태였다.좋지 않은것은 그 매달린 外國詩人은 프랑스 영국이라고 하는 형식주의적인 심리적 향락의 배합의 濃度인 詩人뿐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詩人의 민중에게 제공한 詩는 전혀 근거를 알지 못하는 詩語로 가득한 詩뿐으로 민중의 詩에서 離散하여 詩에의 실망은 세월과 함께 깊어져 간 것이다.
「近頃の詩はどうもわからない――」といふ人はまだ詩に対する執着がある方で、さうした言ひ方をした人も、何時雑誌の中から詩を拾ひ読みしても、よくも恥かしくもなく――と思はれる愚劣な内容を露呈してゐる詩、或はまた全く精神の整理などを心掛けない、ふしだらな混乱の詩、などを、読ませられるため、この昔の詩のファンは、しまひには、「近頃の詩はどうもわからない」といふ、近頃の詩に対する感想から、言ひ方をしだいに変化させて「僕は詩は、わからないよう!」と言ふやうになつてしまふのである。読者としての彼は、自分が時代遅れかどうかして、近来の詩がわからないのではないか、何か自分の知らないやうな新しい詩形式の理論があつてそれに基づいて、あのやうな難解な詩を詩人たちがつくるのではないか、理解できないのは自分の方に責があるのではないか! といつた引取り方をして、「僕は詩はわからない!」といふやうにしてしまふのである。現代の詩人は、その態度の不面目さの故に、一般読者、所謂民衆を詩から、切断してゐる許りでなく、かゝる形式主義詩人は、民衆の心の詩に対するものを、かなりにコジらしてゐるのである。
<요즈음의 시는 도무지 알수가 없어!__>라고 하는 사람은 아직 詩에 대한 집착이 있는 분으로 그러한 말을 한 사람도 언제고 잡지 속에서 詩를 끄집어 읽어도 퍽이나 부끄럼움도 없이__라고 생각되는 愚劣한 내용을 나타내고 있는 詩 혹은 또 전혀 정신의 정리등을 마음에 두지 않은 조잡한 昏亂의 詩등을 읽게 되기 때문에 이 옛날의 詩fan은 마지막에는 <요즈음의 시는 도무지 알수가 없어!>라고 말하며 요즈음의 詩에 대한 감상에서 표현을 점차로 변화시켜<나는 詩는 알지 않을거야!>라고 말하는 듯이 되버린 것이다.독자로서의 그는 자신이 시대에 떨어진건지 어떤지 근래의 시를 모르는것은
아닌가?뭔가 자신이 알지 모르는 듯한 새로운 詩형식의 이론이 있어서 거기에 근거하여 저와 같은 난해한 詩를 詩人들이 만들고 있는것은 아닌가?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 쪽에 책임이 있는것은 아닌가? 라고 하는 후퇴를 하여 <나는 詩는 몰라!>라고 하는듯하게 되버린 것이다. 현대의 詩人은 그 태도의 수치심 때문에 일반독자 소위 민중을 詩에서 절단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이러한 형식주의 詩人은 민중의 마음의 詩에 대한 것을 대단히 곤란하게 하고 있는것이다.
詩がわからない読者には、何の責めもないのである。わからない詩を平然と発表して、読者を詩から益々引離してゐるのは詩人自身なのである。それの証明は私ができる、私といふ詩をつくる人間が一般読者と等しく、さうした種類の詩は「わからない」のであるから、推して知るべしである。たゞ私が一般の読者と異るところは、詩の門外漢である読者のやうに、近来の詩に対して「近頃の詩はどうもわからない」或は「僕は詩はわからない!」といつた感想を述べるにとゞめてをくことが出来ない立場にある。私は読者のやうに右の精神的過程も辿つたこともある。しかし実際にこれらの形式主義詩人と意見の対立状態で詩作の経験をつづけてゐるうちには、これらの難解な詩は、人生の虚偽であることがはつきりして来る。「判らないやうな詩、そんなものは詩ではない!」とはつきりと断罪を下す位置に、今はある、一般の読者も、曾つての詩のファンも「僕は詩はわからない!」などと責任の背負込みをしないで、私のやうに、わからないやうな詩は、詩でないといふ突放し方をして欲しいものである。
詩를 모르는 독자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것이다. 알지 못하는 詩를 태연하게 발표하여 독자를 詩에서 더욱 멀어지게 하는것은 詩人 자신인것이다. 그것의 증명은 내가 할수 있어!내가!라고 하는 詩를 만드는 인간이 일반독자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종류의 詩는<몰라!>이기에 미루어 알아야만 한다. 단 내가 일반 독자와 다른 점은 詩의 문외한인 독자처럼 근래의 詩에 대하여 <요즈음의 시는 도무지 알수가 없어!>혹은<나는 詩는 몰라!>라고 하는 감상을 말함에 머물수가 없는 입장에 있다.나는 독자처럼 위와 같은 정신적 과정도 거친적도 있다.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형식주의 詩人과 의견이 대립상태로 詩作의 경험을 계속하고 있는 중에는 이러한 난해한 詩는 인생의 虛僞라고 하는 것이 확실히 온다.<알지 모를듯한 詩 그런 것은 詩가 아니야!>라고 확실하게 斷罪를 내리는 위치에 지금은 있으며 일반 독자도 예정의 詩fan도 <나는 詩는 몰라!>등으로 책임을 지지 않고 나처럼 알지 모를듯한 詩는 詩가 아니다라고 하여 뿌리치고 싶은 것이다.
何かわからないが、モヤモヤとしたものがあるといふことが詩だといふ思ひ込み方は、それを読者が少しでも認めることに依つて、この種の詩人は懸命に、そのモヤモヤを製造しようと画策する、このモヤモヤの悪だくみは、それが妙に利くことがあるのである。モヤモヤの支持者である読者は、その作者である詩人と共に、多くはその精神的状態はジレッタントが多いのである。詩は現在のやうに、その難解の故に行きづまるといふことは、どういふ理由、原因をもつてゐるだらう。難解のその反対の側にある、平易といふことは、詩の世界ではどういふことになつてゐるだらう。我々は現実が難解なものだといふことを否認はしてゐないのである。しかしその難解な現実を平易にわかりやすく表現する自由はまた私のものである。その上に情緒的手段に於いては「最高の抒情詩とは諷刺詩以外にはない!」と私が主張した途端に、幾人かの詩人は、身ぶるひしてとびあがつた筈だ。「諷刺詩が抒情詩だなんて恐ろしい恥知らずだ!」と私は非難される。諷刺といふものが、感情的表出であるといふ意味で、その詩人にとつての詩情であることは否定することが出来ない筈である。ある人は諷刺を手段であるとみて感情ではないといふ、抒情詩などといふ純粋なものに、手段などといふ汚ならしい物指しをあてるなどといふことは嫌だといふ。これからの詩壇は、好きだ嫌ひだといふ問題の扱ひようによつては、済まないであらうし、済ましてはいけないであらう。
뭔지는 모르나 애매한것이 있다고 하는 것이 詩다 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그것을 독자가 조금이라도 인정해줌에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詩人은 열심히 그 애매한것을 제조하려고 劃策하며 이 애매한 트릭은 그것이 묘하게도 효과가 있는 것이다. 애매함의 지지자인 독자는 그 작자인 詩人과 함께 많게는 그 정신적 상태는 dilettante 가 많은 것이다.詩는 현재처럼 그 난해함 때문에 停滯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이유,원인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난해 그 반대측에 있는 平易라고 하는 것은 詩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으로 되고 있는것일까?우리들은 현실이 난해한것이라고 하는 것을 부인해서는 안되는 것이다.그러나 그 난해한 현실을 평이하게 알기 쉽게 표현하는 자유는 또 나의 것이다.게다가 정서적 수단에 있어서는 <최고의 抒情詩라는 것은 諷刺詩 이외에는 없다!>라고 내가 주장한 순간에 몇몇 詩人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펄쩍 뛸것은 틀림 없다.<풍자시가 서정시라니!끔찍이도 부끄럼을 모르는군!>하고 나는 비난을 받는다.풍자라고 하는 것이 감정적 표출이라고 하는 의미로 그 詩人에 있어서의 詩情인 것은 부정할 수가 없는것이다. 어느 사람은 풍자를 수단 뿐이며 감정은 아니다 라고 하며 서정시 등이라고 하는 순수한 것에 수단등이라고 하는 지저분한 尺度를 댄다고 하는 것은 안된다 라고 말한다.이제부터의 詩壇은 좋다 싫다 하는 문제로 취급하여서는 해결이 되지 않을 듯하며 해결해서는 안될것이다.
この人達のいふ抒情詩が、全く手段なしにつくられてゐるといふ事実を私は認めよう、しかし何か助太刀がなければ、この才能なしの抒情詩人が、一篇の詩をつくりあげることができる筈がない。その助太刀は、インスピレィションとか、偶然性とかいふものである。真の霊感を生みだすやうであれば、天下の詩聖であるべきはずである。しかし彼等は胸がぐつと突き上げてきただけで、それをインスピレィションに繰り入れて、どうやら一篇の抒情詩をつくりあげる。詩作が終ると黄色い水を吐き、あわてゝ胃散を頬ばるのである。一切の感傷的な世界をもつて抒情詩であるといふ詩人は、さうした考へから離れて諷刺詩にすゝむなどといふことは考へられない。何故ならこの詩人達は、諷刺詩の世界にまで、自分のファンであるセンチメンタルなお嬢さんの読者を引きつれて、家移りするほどの自信も、勇気ももたないからである。詩情といふ甘味なものはすべての詩人の愛好物である。諷刺詩人はこの甘いもの、既存する抒情詩の詩的材料の代表的なもの「詩人――あゝ、星か菫か」と世間でいはれるところのものに対して、どのやうな態度をとるであらうか、諷刺詩が抒情詩だといふ意味のわからせ方の一つとして述べれば、既成抒情詩人の女の子をくすぐる詩的材料としての、星か菫は或は月、太陽、などの材料は、そつくりそのまゝ素材として頂戴できるといふこと、しかも多くの既成詩人が、月の歌ひ方を、精々五種類位より歌ひ分けることができないのに、風刺詩としての抒情詩は、幾十種でも、無限な歌ひ方をして、その詩人として、月と詩人との親和状態に於いて、現実的真実を詩句として証明できるのである。
이러한 사람들이 말하는 서정시가 전혀 수단이 없이 만들어졌다고 하는 사실을 나는 인정한다 하여도 뭔가 지원이 없으면 이러한 재능이 없는 서정시인이 한편의 詩를 완성할 수가 없는것이다.그 지원은 inspiration이라던가 우연성이라던가 하는 것이다.진실된 靈感을 만들려고 한다면 천하의 詩聖이어야만 한다.그러나 그들은 가슴이 울컥 벅차온것 뿐이며 그것을 inspiration으로 짜깁기 하여 어떻게 하던 한편의 抒情詩를 만들어 낸다. 詩作이 끝나면 노란 물을 토하고 황급히 胃散을 퍼뜨리는 것이다.일체의 감상적인 세계를 가지고 서정시라고 하는 詩人은 그러한 생각에서 떠나서 풍자시로 진전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 되어지지 않는다.왜냐하면 이러한 詩人들은 풍자시의 세계까지 자신의 fan인 sentimental한 아가씨 독자들을 데리고 이사를 할 정도의 자신도 용기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詩情이라고 하는 감미로운 것은 모든 詩人의 愛好物 이다.풍자시인은 이 단것 기존하는 서정시의 詩的재료의 대표적인것의<詩人___아!!별이냐!제비꽃이냐!>라고 세상에서 말하고 있는것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것일까?풍자시가 서정시이다 라고 하는 의미를 알려주는 방법의 하나로서 말한다면 旣成서정시인이 여자아이를 간지럼 태우는 詩的소재 로서의 별이나 제비꽃 혹은 달,태양 등의 재료는 있는 그대로의 소재로서 받아들일수 있다는 것으로 게다가 많은 旣成詩人이 달을 노래한 방법을 정성껏 다섯가지 정도에서 나누어 노래할수가 없는데도 풍자시로서의 서정시는 수십종이라도 무한한 노래 방법을 취하여 그 詩人으로서 달과 詩人과의 친화상태에 있어서 현실적 진실을 詩句로서 증명할수가 있는 것이다.
日本の詩が大衆と切り離されてゐるといふことの最大な理由は、民衆の日常語をもつて詩人がそれを詩句とすることを、あまりに軽蔑してゐるからである。抒情詩は諷刺詩に到達して、始めて、その詩情といふ人間的感情の、社会的機能を果すことができるものであるといふ理論よりも前に現在の詩人が如何に民衆の言葉を自己の詩の言葉とすることが、むづかしいことであるかといふことを、先づ経験すべきであらう。現実を難かしく難かしく、思はせぶりに歌ふことは何倍もの苦しみがあることをさとる筈だ、それといふのも言葉の性質の選択にも全く庶民的位置に立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である。そのことが堪へられるかどうかが先づ問題となる。然し現状の見透しは先づ不可能とみていゝ、何故なら、現在の詩人は詩のあまりに判りきつた詩語の問題からも、なるべく避けよう、避けようとしてゐる。グウタラな態度をもつてしては、到底その素材に於いて庶民的に――形式に於いて諷刺詩に(彼等は諷刺そこなつて、ナンセンスな槍で豚の尻を突くものも、近頃みかけるやうであるが)また詩の言葉を、常識的ではなく高度な普遍的な言語として、一定の位置にをいて揺がさず、その歌ふ目的を歌ひ切つてしまふなどといふ手際の良い芸当は彼等には、出来さうもない。観念をもてあそぶことに忙がしくて、自分が使つてゐる詩の言語の細部にわたつての組み立てに、執念ぶかい検討を加へるといふことを忘れてゐる。
일본의 詩가 대중과 떨어져 있다고 하는 최대의 이유는 민중의 일상어를 가지고 詩人이 그것을 詩句로 하는 것을 너무나도 경멸하고 있기 때문이다.抒情詩는 諷刺詩에 도달하여 비로서 그 詩情이라고 하는 인간적 감정의 사회적 기능을 다 할 수가 있는것이라고 하는 이론보다도 전에 현재의 시인이 어떻게 민중의 언어를 자신의 詩의 언어로 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는것일까 하는 것을 우선 경험해야 할것이다.현실을 어렵게 어렵게 생각나는대로 노래하는 것은 수배의 고충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것이며 그러한 것도 언어의 성질의 선택에도 전적으로 서민적 위치에 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것을 감수 할 수가 있을지 어떤지가 우선 문제가 된다.그러나 현상의 透視는 우선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으며 왜냐 하면 현재의 시인은 詩의 너무나도 확실한 詩語의 문제에서도 될수 있는한 피하자 피하자 하고 있다.맥빠진 태도를 가지고 있어서는 도저히 그 재료에 있어서 서민적으로__형식에 있어서 풍자시에(그들은 諷刺에 상처를 입혀서 nonsense적 槍으로 돼지 엉덩이를 찌르는 것도 요즈음 발견한 듯 하지만)또 詩의 언어를 상식적이 아니라 고도한 보편적인 언어로서 일정한 위치를 두고 흔들리지 않게 그 노래하는 목적을 노래해 버린다고 하는 솜씨가 좋은 재주는 그들에게는 될것 같지도 않다.관념을 가지고 노는것에 바빠서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詩의 언어의 세부에 걸쳐서의 조립에 집념을 깊이 하여 검토를 가한다고 하는 것을 잊고 있다.
或る詩人はその詩語に加へられた工夫が珍らしくて、もてはやされてゐる。しかし私はこの種の形式主義者が、詩語に加へる努力といふのは、その言葉の内包してゐるものを失ふために努めてゐる。そしてその加工は、言葉の実質を失つてしまつたといふ意味で、何かしらモヤモヤとした風韻なのである。しかし我々の立場は全くその反対である。現実に流布されてゐる言葉に対する疑問も加へる。そして、民衆語の選択は勿論、言葉そのものの物質的基礎を吟味するのである。歴史的物質としての言語として、我々の採択する詩語として選むのである。もしその言葉が封建的要素がある場合にも、決して私は言葉のアカデミズムとして、排除しない。その言葉を解体し、更にそれを組織する。さういふことは可能かどうかといふ疑ひはもつ必要はない。何故なら、昔から詩人とは「言葉の発明者」といはれてゐるその理由は、現在に於いても、詩人の言葉に対する態度に於いて、現実の発見と称される言葉の発見発明といふ意味で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だらう。
어느 詩人은 그 언어에 가해진 工夫가 진기하여 크게 자랑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종류의 형식주의자가 언어에 가하는 노력이라고 하는 것은 그 언어가 내포하고 있는것을 잃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그리고 그 加功은 언어의 실질을 잃어 버렸다고 하는 의미로 뭔가 애매한 風韻인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입장은 전혀 그 반대이다.현실에 유포되고 있는 언어에 대한 의문도 가해진다.그리고 민중어의 선택은 물론 언어 그것의 물질적 기초를 음미하는 것이다.역사적 물질로서의 언어로서 우리들이 채택하는 언어로서 선택하는 것이다. 만일 그 언어가 봉건적 요소가 있는 경우에도 결코 나는 언어의 academism으로서 排除하지 않는다.그 언어를 해체하여 더욱이 그것을 조직한다. 그러한 것은 가능할지 어쩐지 하는 의문은 가질 필요는 없다.왜냐하면 옛날부터 詩人이라 함은<언어의 발명자>이라고 하는 그 이유는 현재에 있어서도 詩人의 언어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현실의 발견으로 칭해지는 언어의 발견발명이라고 하는 의미로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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